2009년 12월 1일 화요일

여행> 2007년 1월의 인도를 되돌이켜.



<사진을 찍은 곳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인도의 Kerala, 께랄라주는 인도의 동남(South-Eastern Part of India)쪽에 있다. 1498년 Vasco Da Gama의 상륙, 그리고 이어지는 Portugal, France, Holland 등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며,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진 가운데  최초로 선거를 통한 공산 정권이 들어선 곳이다. (인도는 지방자치제를 택하기에, 각 지역에 따라 정당, 혹은 정치 체제가 다르다.) 21세기에 들어, Tsunami로 인해 해안 혹은 강 주변의 작은 마을이 파괴되었고, 지금은 다시 삶의 터전을 만들고 있는 곳이다.



<배타고 수로 여행>

   Kerala에서 벗어나 Fort Kochi(http://www.google.com/search?hl=en&q=fort+kochi)로 향하는 뱃길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 때 만난 영국인과 신나게 Brit. Rock 이야기를 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 친구와 함께 Snowpatrol의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나는 배 갑판 위의 의자에 앉았다. 어떤 풍덩 소리가 났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빈 배가 보였다. 그리고 얕은 물거품이 일어난 걸 알게 되었다.

    저 배, 분명 누군가가 강 한가운데로 저어 왔다. 그저 나무기둥을 묶어 만든 작은 포구에 메어놓았던 줄이 풀려 저기까지 물길에 밀려 온 것이 아니다. 얕은 물거품이 일어난 걸 보니, 누군가 배를 저어 저 곳까지 왔고, 그 혹은 그녀는 강 안으로 뛰어들었나보다.  


 

<이미지에 대해 상상하는 건 피해야겠다.>

   살기 위한 곳이다. 삶을 위한 곳이다. 평화로워 보인다, 어떤 운치가  존재한다와 같은 말은 그저 듣기 좋은 스스로만을 위하는 소리이다.


 

< 일종의 분석, 도시 사람 되돌아보기>

   왜 뛰어든 것일까? 저 날은 무척 더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배를 저어 온 사람은 더위를 못 이겨 강물 안으로 들어간걸까? 혹은 삶이 버거워 수영을 하기 위한 것일까?

    아마도,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을테다. 나와 같이 여행자들은 스스로의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굳이 강물로 뛰어들지 않는다. 강물 잠수는 유희 거리치고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커다란 Beach에서 피부 태우기나 할 뿐이다.

   뱃사람에게 강물로의 잠수는 그에게 노동이다. 마치 같은 시간, 지구 어딘가에서 커다란 건물 안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나, 거드름을 피우며 크고 푹신 푹신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겠다는 대통령이나, 작고 어두운 반지하 방에서 곰 인형 모양의 천쪼가리를 꿰메는 사람이나, 여하튼간에 누구나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다. 그들의 노동 방식이다.

    강에서의 물고기 잡이는 여행하는 도시인에게는 새로움을 줄테다. 특히 나와 같이 한강을 끼고 사는 사람에게, 강은 단지 물 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관광삼아 유람선을 타고, 수상택시를 잡아 타는 곳이니 말이다. 생존의 터전은 아니다. 또 가끔은 쉰다는 명목 하에 찾아가는 곳이지, 삶의 터전이 아니다. 내가 가는 학교와 가야 할 사무실과 같은 공간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저 곳은 쓰나미(Tsunami)가 몰아쳤을 때, 대부분의 주민이 죽었고, 커다란 나무 외에 대부분의 생명이 그 삶을 끝낸 곳이다. 이런 곳에서도 누군가는 살기 위해 다시 노동을 한다. 살기 위한 당연한 노동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노동에 대해 우리는 걱정하고 또 안타까워한다. 우리의 겉 보기 좋은 이기적인 삶을 되새겨보지는 않고 말이다. 대개의 자연을 즐길 것으로만 바라본다. 이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는 요지다. 자연은 옛날의 사람들이 살던 곳이고, 생활하던 곳이다. 하물며 지금도 자연을 터전으로 가진 사람은 존재한다. 도시에서만 살아 온 나와 다른 공간에 있기에 만날 일이 없었고, 만난 일이 없으니 그런 이는 없다고 여기고 사는 일이 생겨났을 뿐이다.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자연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편리한 공간으로, 인간에게 최적화된 공간으로 만드는 시도는 슬픈 결과를 낳는다. 우리의 편리가, 저들과 같이 자연을 터전으로 삼는 이들에게 재앙이 된다. Tsunami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수 많은 '세계인'들의 도시화와 자연의 파괴가 Tsunami를 불러일으켰다. 루머이긴 하지만, 미국의 환경무기 실험이 탓이라는 이유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관광지가 되어버린 해안가의 탓이 있다는 사실도 새겨봐야 한다. 편리를 위해 지형을 바꾸고, 땅을 메꾸고, 잘라내는 우리의 어리석은 짓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연은 대상이 아니다. 무언가 손을 써야 하고, 또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엄연히 우리의 터전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몇몇 사람들의 이기심 어린 자연에 대한 정복 혹은 인위적 변화는 우리보다 더 자연에 두려워하며, 친하게 지내는 이들에게 아픈 자연의 복수를 전가할 높은 가능성이 생겨난다. 자연을 위해서나, 그의 복수 대상이 되버리는 약한 사람을 위해서나, 혹은 결국 마지막 복수의 대상이 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자연을 어떤 대상으로 바라보는 짓을 그만둬야 한다.


 

<단순한 묘사>

   강이 있다. 그 강을 지나는 나는 빈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물거품이 배 주변에 그리 크지않게 생겨난 걸 보니 배의 주인은 내다 팔 물고기를 잡으로 바다에 뛰어든 모양이다.

 

 

<반성>

   인도가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에다  '자연'과 삶의 '문화'를 잘 합치시켜 나가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과 요가, 환상의 나라라는 말 장난에 매혹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영국인들이 유사한 식민지배를 위해 인류 최초로 시도한 '인도학'이라는 일종의 문화학을 만들어 낸 시도와 비슷할 뿐이다. 합치라는 말은 사실 웃기다. 그 자연과 문화가 동떨어진 것이 아닌데 말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자연을 두려워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욕심이 덜한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 내가 그 나라를 이렇게 정리를 하는 시도 역시도 류시화 시인이 만든 인도에 대한 환상과 같은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러 기술의 발전 단계, 먹을거리와 종교, 깨침을 위한 여러 습관과 학문이 존재하는 문화의 다양함, 이러한 '인간의 노력'과 '자연'이 어우러지게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이 인도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흠, 허나 인도 안에서 마구 커지는 자본주의의 힘 탓에, '도시가 자연보다 나음', 혹은 '사람으로서의 성장'이 아닌 '편리의 개발'이 먼저가 되어가는 모습으로의 변화가 인도를, 인도로의 여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차근 차근이 필요하고, 더불어가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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