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7일 금요일

27NOV> 양양 - 나는 (a.k.a. "Na Neun", "I Am")



 따스하다. 간결하다. 느릿하다. 찬찬히 내 주위를 둘러본다.

 양양의 노래는 이런 느낌을 가져다준다. "노래, 단순히 듣고 흘릴 것만은 아니야"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 노래를 부른다. 발성이 어떻다, 목소리가 깔끔하다, 가사가 좋다, 음악이 좋다, 이런 세세한 비평거리들을 잊게 한다. 그 구성이 어떻든, 노래의 힘을 안겨준다. 그래서 양양의 노래를 종종 듣는다.


양양 (www.yangyangstory.com/)
시시콜콜한 이야기 (2009)

01. Hello
02. 봄봄
03. 위풍당당
04. 시시콜콜한 이야기
05. 오! 사랑이여
06. 나는
07. 풍악
08. 이 정도
09. 길위에서
10. 청춘
11. Did I Say
12. 문득  




다가오는 2009년 12월 4일 양양의 앨범 발매 기념 콘서트도 홍대 앞 SSAM에서 열린다.


  아마도 나는 못 갈테다. 양양 누나, 공연 때 잘 쉬고, 그 주위에 앉은 사람들과 찬찬히 눈 잘 마주치고, 노래도 부르고, 마음을 주고 받고 막을 내리면 좋겠다.

 

2009년 11월 26일 목요일

26NOV> Emma Tricca

Emma Tricca (UK)
Discography
- Minor White (2009)










< I can't find any information, which related with these video clips, therefore, I couldn't put on the names of these songs. Just know the name of singers, EMMA TRICCA, and places,SHH! Festival in UK and GREEN MAN FESTIVAL ,where she performed these songs.>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23NOV> Regina Spektor


Regina Spektor  - EET

1980년, 지금은 무너진 소비에트 유니온의 한 가운데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레지나 스펙토르.
피아니스트, 노래를 지어 부르는 가수.

위키의 설명을 따르면 레지나가 낸 앨범은 다음과 같다.

EET의 마지막 부분의 타자기 소리와 비슷한 소리로의 마무리는 꽤나 독특하다.
추운 하루, 피아노 소리가 노래를 꽤나 따뜻하게 이끌어간다, 추운 하루에 듣기 좋다.

위키백과에서 레지나에 대한 소개

레지나의 공식 웹사이트
http://www.reginaspektor.com


기형도


얼마전, '책 한 권 읽는 일요일' 모임에서 '기형도 전집'을 2주간 걸쳐 읽었습니다.

누군가 "가을이다, 11월, 일찍 죽은 천재에 대해 읽자"고 말했어요. 그래서 나는 '기형도'를 말했지요. "기형도는 천재야."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천재라는 사람의 의미도 사실 잘 모르지만요. 음, "기형도는 천재는 아닐 것 같아."정도의 생각이에요.

그가 천재건, 아니건, 분명한건 죽었지만 아직도 회자되고, 다시 그의 글이 다른 방식으로 또 살아나는 현상이 너무 기이해서였지요. '절망'을 입에 달고 다닌 사람이, 이 시기에 다시 회자된다는 것, 그가 우리에게 남긴 '기형도'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은 왜 인지 21세기 각박한 지금에도 꽤나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건 뭐 근거도 없이, 그냥 난 이렇게 생각해라고 내지르는 글이라서 아쉽네요. 아직 정리가 잘 되질 않습니다. 그에 대해 무어라 써야 하나 말이지요.)

어찌되었건, 기형도는 죽고 난 후,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르고 흘러 지금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시가 실리기도 하고, (7차 교육과정에서 '홀린 사람', '빈집'이 실렸다지요.), 영화와 연극, 소설, 노래 등 각 예술에서 다시 살아났지요.

각설하고, '책 한 권 읽는 일요일' 모임을 위해 만들었던 '성석제'씨가 쓴 기형도에 대한 글을 재가공한 자료 하나를 내놓습니다. 조금 줄이고, 또 조금 늘렸답니다. 성석제씨의 글쓰기에 손을 대서 죄송하고, 또 부족함 투성인지라 도망가고 싶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싶어서요. 읽기 보다 편하게 바꾸어놓았어요. (제 생각에는요.)

기자 기형도에 대한 모습을 조금 늘리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기형도의 동료의 글들을 조금 떼다 붙였습니다.

언젠가 기형도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럴 만한 생각과 글의 능력으로 제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책 이야기> 소설 (제임스 미치너)

소설, 제목이 소설인 소설이다.

제임스 미치너의 작품이다. 84살의 나이에 지은 이 작품은 꽤나 독특한 구성이다.

구성을 언급하기 전에,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적어본다.

소설을 쓰는 이를 소설가 혹은 작가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내어놓은 책은 편집자와 작가 사이의 관계 속에서 '작가'만의 생각이 다듬어지거나, 재설정 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은 대중들에게 전해진다. 대중은 독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또 독자들 가운데 소설 혹은 문학 작품을 일정한 이론 혹은 사상에 근거하여 평하는 비평가들이 있다. 크게 볼 때 소설 한 편이 관계맺는 인간 군상의 종류는 네 종류인 셈이다.

작가, 편집자, 독자, 비평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이 독특한 구성인 이유는 '본인의 소설'을 하나의 시간 흐름을 넷으로 나누어 위의 네 군상들의 관점에서 각기 다르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이 쓰여지는 시간, 출판 전의 단계에서 편집자와 소설가의 시간, 비평가의 시간, 독자의 시간, 이렇게 말이다. 한 편의 작품에는 하나의 관점만을 드러내고 있는 보통의 소설과 다른 점이다. 그리고 각기의 관점에 있어서 '한 편'의 소설이 나오고, 세상에서 이해되는 순간을 꼼꼼히 묘사한 점이다. 그리고 작품에만 치우치게 되면 사뭇 지루해질 이야기를 위해서인지 그는 일종의 이야기의 흥미거리를 끌 도구도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사랑, 가족, 살인, 인간의 극단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현재 쓰고 있는 글

1> 인도로 떠나는 여행자들을 위한 책 몇 권 (현재 쓰는 중)
2> 서양철학계보도 만들기 (현재 진행 중)
3> 책 읽기의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글 (-)
4> 자기기록 (진행 중 10% 진행)
5> 뉴 미디어 아트에 관한 글 (개요만 짰음)

우선순위
4> 1> 5> 2> 3> --

2009년 11월 16일 월요일

신뢰와 연대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만들기

   신뢰와 연대는 무엇인가? 신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연대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어진 네트워크를 말한다. 신뢰와 연대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함께 그들의 양심이 공동체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개인의 양심이란 개인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은 절대적이지 않다. 또한 국가의 윤리와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국가는 법률과 관습이라는 윤리를 갖고 있다. 국가는 법률을 통해 개인은 ‘양심의 자유’의 범위를 조절한다. 개인은 온전히 자신의 양심을 통해서 살기 위해서는 국가 공동체의 상징인 국적을 부정하는 방법 외에는 선택할 것이 없다. 국가는 왜 국가의 윤리를 통해 개인의 양심을 조절하려 하는가?

 

    왜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가 충돌한다고 생각하고, 서로 간의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인가? 대화를 이야기할 때 학교는 권위를 이야기하고, 국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권위와 관습과 전통이라는 변명을 버리면 충돌은 사라진다.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는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

 

    첫째, 공동체는 공간을 만들고, 개인들의 합의를 통해 공동의 목표와 기회를 제시한다. 개인은 공간과 목표와 기회를 통해 자신의 에고를 표출하고 정립한다. 인도에는 오로빌이라는 독특한 공동체가 있다. 그 곳에서는 일의 조직화와 봉사의 기회가 직위와 직권을 대신한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개인 간의 대화를 통해 약속했다.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 지위로 인한 가치보다 각 개인의 장점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체는 공간을 제시하고, 기회를 제시한다. 더욱이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사회의 성격이 개인들의 관계를 통해 제시되고 만들어진 점이다. 개인은 사회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는 좋은 예이다.

 

    둘째, 공동체의 공공성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확보되며 유지된다. 국가의 공공성은 엄격한 국가의 법적, 윤리적 잣대로만 지켜져야 할까? 아니다. 또한 하버마스에 따르면 사회 구성원들 간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개인의 의사가 사회에 충실히 반영되고, 이는 공공성을 확보하고 유지하여 공동체의 윤리를 지탱하는 최적의 방법이며,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고 한다. 오로빌의 예를 들자면, 오로빌은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으로 개발하는 곳이다. 또한 오로빌은 개인이 제안하고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발전된다. 프로젝트는 오로빌리언(오로빌 시민)의 회의를 통해 만장 일치의 결과가 나왔을 때 진행된다. 회의를 통해 제안자는 다른 시민에게 그의 제안을 알릴 기회를 갖는다. 또 한 번의 회의가 아니라, 프로젝트에 대한 토론의 기회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조율한다. 오로빌의 이러한 독특한 사회 구조와 사고는 UN이 선정한 가장 인간적인 공동체로 인정받는 이유이며, 그들의 실험이 인도를 넘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이다.

 

    셋째, 올바른 공동체란 무엇일까? 장하준은 국가의 경우, 공공성을 지닌 공기업을 확대하여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제안을 경제의 범위를 뛰어 넘어 보다 생태적인 모델로 올바른 공동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오로빌의 자신들의 자금을 통해 만든 생활조합과 지속 가능한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를 운영한다. 생활 조합은 조합형태로 친환경적이고, 높은 미적 수준을 보이는 상품을 생산한다. 예를 들어, 나무를 쓰지 않고 직물로 만드는 노트, 유기농 재배 차, 여러 공산품을 만든다. 지속 가능한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황무지를 숲으로 만들고 있다. 이것들은 개인의 제안에 의해 공적인 사안이 된 것들이며, 회의를 통해 공공성을 얻게 되어 여럿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되어 진행 중에 있다. 올바른 공동체란 개인과 공동체의 구분이 희미한 상태이다. 개인과 공동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프로젝트의 생산과 진행, 소비까지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걷는 길이 공동체의 길이 아닐까 생각된다.

 

    공동체는 신뢰와 연대가 기반이 되야 하며, 개인의 자유를 대화와 토론을 통해 보장해야 한다. 또한 공공성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한다.

 

만질 수 없는, 클릭할 수 있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에 접속하다

<필통넷 실라부스 클럽 (http://club.filltong.net/syllabus/board/2483)에도 포스팅합니다.>




만질 수 없는, 클릭할 수 있는

: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에 접속하다

 

 

목적

 1.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의 모습을 살펴본다.

 2.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 공간'을 찾아갈 수 있는 길 안내자 되기를 지향한다.

 3. 이 정보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예술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Source

 1. 한글과 영문으로 된 위키백과 또는 위키피디아의 정보를 수용한다.

 2. 이론에 대해서는 관련된 서적을 참조한다.

 3. 온라인 상의 전시에 대해서는 검색 엔진과 관련된 홈페이지 등의 정보를 통해서 수집한다.

 

 

원칙 -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

 1. 온라인 상의 전시에 한정한다.

 2. 공유할 작품의 장르를 한정짓지 않는다. 장르는 열린 것이다.

 3.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작품에 한정한다.

     ('관객이 참여하는 모습에 대한 기록물'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4. 현재 진행 중인 전시에 한정한다.

     (혹은 과거에 진행된 전시의 경우, 전체의 컨텐츠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에만 정보를 공유한다.)

 5.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다.

 6. 본 실라부스에 대한 피드백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

 7. '정보의 인용'과 '정보의 차용'에 대해 꼭 출처를 밝힌다.

 8. 작품을 소개 할 때에는 작가의 이름, 온라인 공간의 주소, 만들어진 시기 등을 밝힌다.

     되도록이면 '이미지'를 캡쳐하여 글과 함께 올린다.

 9. 미디어 아트와 이와 관련된 정보 하나당 '한 개의 게시글'만을 작성한다.

     허나, 갱신했을 경우, 그 사실을 제목에 적는다.

      (무수히 글의 수가 많아질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10. 정제되지 않은 정보의 경우, 정제되지 않은 '개인의 의견'임을 밝힌다.

11. 정보를 기술할 때, 온전한 문장으로 적는다. 바른 문장과 바른 글쓰기를 하도록 노력한다.

12. 정보의 수집은 2009년 11월-2009년 12월로 한정짓는다. 한 주에 하나 이상의 글을 작성한다.

13.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게다. 원칙을 계속해서 유지한다.

 

 

계획

 첫 번째,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에 대해 

 

 - '미디어 아트'

 - '인터랙티브 아트'

 - 관객 참여 예술

 -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

 

 이러한 것들의 의미와 이론에 대한 정보 적기

 

 미디어 아트에 있어서 가장 궁금한 점은 '아트'를 우리 말로는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미술로 혹은 종합 예술, 혹은 또 다른 특정한 예술의 이름으로 풀어야 하는가? 또 다른 이름이 있을까? 이건 사실 명확하지가 않은 것 같다. 다중적 예술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다중 예술이라고 말을 바꿔 부르는 사람도 있다. 미술의 확장, 영상의 확장, 음악의 확장,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다.

 

 또한 미디어 아트는 '과학'과 '기술'공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한 사실로 인정된다. 현재에도 정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그 의미와 형태가 계속하여 변하고 있다. 또 '존 케이지'와 같은 20세기 중반의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노력에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보통 '미디어 아트(Media Art, 관련된 내용은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미디어_아트 를 참조할 수 있다.)' 혹은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단어 그대로 뜻을 풀면, '미디어 아트'란 미디어/매체를 이용한 예술이라는 말이다. 뒤에서 간단히 설명하겠지만,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은 '미디어 아트'와 '인터랙티브 아트'라는 말로 불릴 때가 있지만, 이런 경우는 보다 '상위의' 예술 구분으로 부르는 것 정도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디어 아트'는 보통 일방적인 미디어/매체로 볼 수 있는 대중매체의 기기 혹은 방식을 이용한 예술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상상하면 된다. 하지만 "'미디어 아트(Media Art)'가 무어야?"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미디어/매체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고, 변화하고 있다. 정보 전달의 관계를 볼 때에도, 예전의 미디어/매체들은 일방적인 정보 전달의 모습이었지만, 인터넷과 정보 통신 기기들의 발달을 통해 쌍방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 띄고 있다. '미디어 아트'는 더 넓은 뜻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용되었던 미디어/매체도 더 다양해졌다.

 

 이런 면에서 인터랙티브한, 즉 예술작품(예술작품은 예술가의 분신이겠지)과 관객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예술의 모습이 상상되었고, 계속해서 창작되고 있다. 인터랙티브 아트란 "열린구조로서의 예술"이라 말 할 수도 있다. 미디어 아트에 비해 보다 작은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열린구조로서의 예술'이라는 설명은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가가 만든 예술작품은 고정적인 형태로서 관객의 '관람'만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열린 구조'로서 예술가는 특정한 공간과 시간 동안 작품을 만든다. 하지만 온전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객이 참여해야 한다. '예술가가 설정한 환경'에 관객이 반응을 보일 때, 작품은 그 반응에 응답하는 형태이다. 끝까지 하나의 일관된 형태가 나타나지 않아, 어떤 상태가 '완성' 상태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제 범주를 더 좁혀, 우리가 볼 것은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한 '온라인 상의 예술'이다. 온라인 상의 열린 예술 작품은 '직접 만질 수 없다', 촉감의 쾌락이 사라지는 셈이다. 하지만 마우스나 키보드, 혹은 중간의 매개가 되는 입력장치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열린 예술에 대해 

 

 - 온라인 전시 참여 공간

 - 관련된 온라인 공간(관련된 연구소, 학회)

    - 이론

    - 전시 정보

 - 관련 도서 정리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웹페이지 목록 만들기, 그리고 관련된 정보를 가진 온라인 공간

CURRICULA 소개

블로그를 다시 열어야겠다. 지금까지 열었던 블로그는 일기장에 머물렀다. 뭐 대단할 건 없지만, 이번에는 목적을 가져야겠다. 혼자 공부하는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여러 주제에서의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공유해야겠다.

 

정보는 만들어 내는 것으로 끝나면 안된다. 사람들은 세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하나는 만들어 스스로만을 위해 사용하기, 둘째는 만들어 '재화'와 바꾸기 (판다는 말이다), 셋째는 만들어 나누기. 이 중에서 나는 나만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대개였다. 둘째는 너무 야박하다. 뭐 대단하지도 않은 정보들, 최근에 나오는 정보 중에 정말 돈 주고 사서 볼만한 정보가 어디있나? 자본주의에 미쳐있는 시대라지만, 공짜 자료 몰래 파는 사람도 참 많다. 그리고 일단 정보는 돈과 교환되면 안된다. 정보는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일부 사람들이 가진 정보의 권력은 세상에 해가 된다. 지식인과 지성인의 시대라던 시대도 끝낼 때가 되었다. 여하튼 공유해야 한다는 말이다.

 

버뜨, 정보를 과하게 받아들이거나, 과하게 사용하거나 하는 점에 대해서는 경계해야한다. 만드는 사람이나,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나. 정보를 둘러 싼 사람 모두 정보로 세상을 결정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괜한 정보에 대한 욕심도 독이다. 혼자 게시판에 이것저것 정리해서 백 개씩 글을 올린다 쳐보자. 그렇다고 그 글 쓴 사람이 백 개를 모두 이해했을까? 기억이나 할까? 양에 욕심을 가지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게 되지 않을까? 여하튼 적당히, 필요한 만큼 사용하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뒷 부분은 나한테 스스로 말하는 것이고, 결론은 블로그 만들거에요! 기대는 말아주세요. 대신 어떤 정보를 만들어내는지, 혹시 본다면 이야기 해주세요! 분명 틀린 부분이 '오나전' 많을테니까요!


결론은, 이 부분은 내가 CURRICULA / 커리큘럼을 만들어가며 공개하겠다는 이야기이다.

내 공부를 기록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OCW 소개

OCW란 다음과 같습니다.

OpenCourseWare, or OCW, is a term applied to course materials created by universities and shared freely with the world via the internet. Already in 1999 the University of Tübingen in Germany published videos of lectures online in the context of its timms initiative. The OCW movement only took off, however, with the launch of MIT OpenCourseWare at MIT in October 2002. Since then, a number of universities have created OCW projects, some of which have been funded by the William and Flora Hewlett Foundation.

According to the website of the OCW Consortium, an OCW project:

  • is a free and open digital publication of high quality educational materials, organized as courses.
  • is available for use and adaptation under an open license.
  • does not typically provide certification or access to instructors.
<위 영문 소개는 WIKIPEDIA의 설명 http://en.wikipedia.org/wiki/OpenCourseWare >

중요한 점은 OCW 콘소시움을 통해 (의역을 통해 살펴보면)
자유롭고 열린 방식의 디지털 자료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은 강의처럼 구성되고, 교육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언제나 접속과 사용이 가능해야 하며, 공유를 전제로 한 저작권의 형태를 지녀야 합니다. 학위나 수료증 등을 제공하지는 않으며,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대강 그림이 그려집니다.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들, 교육의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들,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의 사람들, 여러 사람들을 위해 공부꺼리를 공유하겠다는 말입니다.

국내에도 http://www.kocw.net/index.html 라는 검색 사이트가 존재합니다. 이 역시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 만든 사이트로서, 국내 대학의 OCW Courses와 해외의 OCW Courses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료가 미국이나 일본만큼 풍부하지는 않습니다. 국내의 경우에는 대개가 E-Learning 사업과 관계된 대학들 중심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OCW 콘소시움에 참여하는 교육기관들 혹은 운동단체들을 보고 싶다면 http://www.ocwconsortium.org/index.php 에 접속하여 members 카테고리에 들어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각 학교로 바로 접속할 수 있습니다.

http://ocwblog.org/에서는 OCW 콘소시움의 공식적인 블로그로서 종종 관련된 정보가 올라오니, 정보 찾을 때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이 OCW 카테고리에서는 OCW의 일반적인 정보들을 수집, 저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STUDYon 소개

STUDYon은 '날아 혹은 준철君'의 자료 수집 포스트들로서,
한국과 한국 바깥의 '수업계획서 / SYLLABUS'들을 수집하는 포스트입니다.

인문학, 사회과학의 범주의 수업계획서가 주가 됩니다.

그리고 대학과 대학 바깥의 수업, 공부계획서가 포스트됩니다.

마음이 흔들 흔들 거릴 때,

흔들 흔들


마음이 흔들 흔들 거릴 때,

김규항(http://www.gyuhang.net)의 블로그를 찾는다.

그리고 2009/05 카테고리를 누른다.

그리고 5월 23일 이 후의 글을 찬찬히 살펴본다.


"안 울던 사람들도 오늘은 다 무너져 운다.

내일 장인 삼우제를 앞두고 지리산에 잠깐 들어왔는데

여기도 눈물바다고 서울의 눈물들이 문자로 전화로 전달되어 온다.

그래, 오늘은 그게 맞다. 그러니까 사람이다."


이라 적힌 5월 29일의 글을 읽는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 전 이상주의자 노무현과

오만한 신자유주의자 대통령 노무현을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하되 기억해야 합니다."

라는 누군가의 5월 26일의 글을 읽는다.

 

그 이상과 현실 사이를 어떻게 걷느냐가 질문이다.

그 질문을 다시 마음 속에서 끄집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