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일 목요일

시옷과 리을로 만든 지치는 이야기

시옷 ㅅ과 리을 ㄹ
 
 시옷과 리을이 한데 어우러져 만드는 단어들은 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람
사랑
시련
살림
소리
실례
 
 J라는 사람이 도서관에 혼자 앉아 있다. 그는 사랑을 할거라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고, 그는 시련을 겪는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사랑이 시작되지 않는건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끝없이 되물었다.
 
 크지도 않은 통통한 눈은 이제 퉁퉁 부어 올랐다. J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큰 한 숨을 쉬기 위해, 내 몸에 있는 감정들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고 싶었다. 작은 담뱃재가 눈에 들어갔다. 그 때서야 한 번 아주 적은 눈물을 흘렸다. 울지 못하는 모습이 싫었던지, 평소에는 한 두 방울 흐르던 눈물이 세 네 방울로 늘었다. 큰 한 숨은 여전히 잘 쉬어졌다. 숨을 쉬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큰 한 숨은 내가 죽어간다는 증거라는 것을 안다. 물론 당장 죽는 건 아니다.
 
 도서관에서 나와 산책을 한다. 오늘 운전을 하다 납작하게 깔려 죽은 까치 한 마리를 떠올린다. 뼈와 살은 땅에 달라 붙어버렸다. 커다란 탱크가 삼차원의 두 소녀를 깔아 이차원의 존재로 만들어버린 피비릿내나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시 담배를 한 대 문다. 통통한 내 손은 무언가로 누르면 납작해질테고, 태워버리면 작은 점이 될테다. 그러고보면 머리를 굴리며 살던 인간들은 발명가들이다. 케네스 월츠였던가 한 정치학자의 문장이 생각난다. '이론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내 삶을 발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뜩 든다. 사랑에 대한 희망은 시련으로 바뀌었지만, 이건 내게 커다란 까치 한 마리를 떠올리게 했고, 그리고 나는 처참히 깔려 죽은 나를 내가 바라보게 했고, 그 덕분에 나는 머리나 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시련은 시련만은 아니고, 사랑은 단지 사랑만은 아닌게 분명하다. 아마 희망과 절망이 그 모든 단어들 속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는 갈래에 서있다. 이건 희망을 가져야 하나, 절망을 끝내야 하는 판단에 달려 있는게니까.
 
 큰 숨을 쉬면 '히유'라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저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다. 단지 내 마음과 내 머리가 크게 울릴 정도의 소리이다. 나는 울림통이다. 커다란 울림통, 울리면 핏줄을 따라 그 울림이 전해진다. 피 처럼 내 안의 곳곳을 그 울림이 전해진다. 기억을 꺼내보면 좋을 땐 또 다른 소리를 냈었다. '하하, 호호' 슬플 땐 흐느낀다. '흑' 히읗이라는 건 소리를 글로 적을 때 참 유용하다. 히히 하하 학학 헉헉 후후 휴 호호
 
 이렇게 좋은 봄 날, 이런 글을 적는 건 큰 실례다. 하지만 나는 밥을 먹으며 실례를 한다. 죽은 시체를 빨간 불에 굽고, 펄펄 끓는 물에 데치고, 아주 날카로운 칼로 자르는 실례를 한다. 예민하다. 내가 살아야 하니 너를 죽이는 실례를 한다. 대개의 경우 죽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리고 길을 걸으면 다른 이가 걸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례를 한다.
 
 나는 실례한 사람인가. 뭐 그건 모른다. 사람이란, 아니 숨 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실례하고 있는지도. 모두여, 절망을 끝내려고나 하지 말자. 희망이나 찾자.
 
 살아야지.
 
 - 다시 나를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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