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즈는 시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케인즈가 바라보는 시장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이 혼합된 경제의 장이다. 과거의 고전적인 경제학자들의 공공으로부터 "방임"된 상태의 시장은 실패했다는데서 이 생각은 시작되었다. 거시경제적 흐름이 미시적 행동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은, "불황 시기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보다 많은 돈이 유동되므로 시민들의 소비와 투자가 유도되어 경제가 정상 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이 케인즈의 주장이다"라 적은 부분에 해당되는 말이다.
"경제적 과정을 잠재 생산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보는 18세기 후반 이후 고전 경제학자들의 관점과는 달리, 케인즈는 (특히 불황기에) 경제를 이끌어 가는 요소로서 상품에 대한 총수요를 강조했다."
경제적 과정은 생산을 조절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수요를 조절함으로써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닐까?
불황이다. 사람들이 돈이 없다. 그러면 정부가 돈을 푼다. 이 돈을 통해 시민을 물건을 산다.
미친듯이 생산해냈다, 1030년대 미국은. 허나 "포드주의적 생산체계가 가져온 거대한 일반적 생산성의 상승에 의해 공급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던 반면, 수요는 상대적으로 정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번영의 토대는 대단히 취약"했다. 정부의 적자지출, 자본이 없을 때는 저축이 이롭지만, 실업률이 높아질 때는 절약이 경제성장을 침해한다. 시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
케인즈주의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당시의 해결책이었다.
전후로 계속하여 케인즈주의는 정책적 우위를 점한다. 60년대 리차드 닉슨은 '지금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허나 이 때의 하이에크는 케인즈에 비해 빛을 발하지는 못 한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주의적 사민주의에 대해 계속하여 반발한다. 비판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73년 오일 크리시스, 74년 하이에크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
포디즘의 한계인가, 케인즈주의의 실패인가, "공급"의 긴장, 공급의 긴장은 무엇인가?
포디즘을 통해, 기업과 자본가들은 끝없이 기계설비를 계속하여 늘려나갔다. 생산성이 줄어들었다. 여기에서 포드주의의 실패, 즉 노동조직원리의 위기가 드러난다. 노동자들은 기계가 늘지만, 임금은 그리 많이 오르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임금을 인상하려 시도한다. 기업가들은 수익성 위기를 맞는다고 한다. 기계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값은 싸지니, 상품을 늘리면 늘릴 수록, 값은 싸지니 공장은 수익이 준다. 노동자 또한 수익이 줄어든다. 악순환이다.
노동자는 저항한다. 기업은 가격을 올린다. 가격이 오르고, 임금은 오른다. 인플레가 생겨난다. 돈의 가치가 줄어든다. 같은 만원이어도, 지금의 만원과 예전의 만원은 다르다. 이제는 탕수육을 못 먹는다.
여하튼 수치상으로의 물가가 오른다. 이러한 인플레에다, 게다가 실업률은 높아지고, (장사가 안되니 사람들을 그만두게 한다), 경기는 안 좋아진다. 이게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이런 상황이다. 여기에서 왜 신자유주의의 하이에크가 나왔나?
구춘권의 설명이다.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는 한마디로 케인즈주의적 사회국가의 개입에 의해 실현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의 추종자들은 포드주의의 실패, 즉 국가 개입의 실패를 빌미로 시장을 자유로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발생했고, 미국과 영국 시작했고, 프랑스, 남미에로 계속되었다. 답은 신자유주의였다. 이 말은 맞는가? 아니 그들의 선택은 신자유주의였다. 국가의 개입, 국가는 더 이상 생산과 소비에 대해 손을 댈 수 없다. 이것이 탈규제와 시장을 통한 조절로 대체된다. 시장의 힘은 말 그대로 자유로와진다. 국가가 재편된다.(설명 필요) 국가들은 스스로에게 알맞는 생산 체계를 만들어낸다.
레이건의 말을 보자,
레이건의 연설 (83년 세계은행 연례회의)
"가장 단기간에 가장 극적이고 전반적인 경제적 진전을 이룬 사회들은 가장 규모가 큰 곳도, 가장 자원이 풍부한 곳도, 그리고 당연히 가장 엄격한 통제를 받은 곳도 아니었다.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시장의 마술을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각자 독자적인 결정을 수행하는 수백만 명의 개인들은 늘 그 어떤 중앙화된 정부 계획 경제 과정보다도 자원을 더 잘 분배할 것이다."
하이에크의 철학은 두 가지 입장에 근거한다.
"첫째, 문명의 성장은 사적 소유권이라는 맥락에서 제각각 목적을 추구하는 구성원들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사회제도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시장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협동을 통해 도출될 때 가장 잘 작용한다. 시장경쟁은 '인간계획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산물인 경제적 질서('조화cosmos')를 발생시킨다.
둘째, 그러므로 정부는 자신의 통제력, 특히 억압적인 권력이라는 영역에 제한을 두고 한정시켜야 하며 민주적이어야 한다. 계획된 경제 질서들('배열taxis')은 어느 정도를 넘어선 복잡성을 다룰 수 없다. 특히 집단주의적 경제계획 (사회민주주의적 유형이라 하더라도)은 불가피하게 전체주의적 독재로 이루어진다."
(P37, 리처드 피트, 불경한 삼위일체, 삼인)
-
반케인즈주의, 흔히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이야기는 공산주의라는 것의 위협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불경한 삼위일체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 자기규제적 시장과 기업가 정신을 우선시하는, 보수적이지는 않되 우익적인 사고에 기초한 신념으로 짜여진 완결적인 구조"다. 그리고 "19세기 영국의 '고전적인' 자유주의 신념을 새롭게 갱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19세기의 고전적인 자유주의는 홉스, 로크, 흄, 아아담 스미스의 17,18세기의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다듬은 형태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