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일 목요일

故 조요한 님의 '예술철학'을 읽고, 이어지는 생각 아주 조금과,



"만일 예술가가 단순히 천부의 재질로써 노름삼아 하는 장인이 아니라면, 예술가는 주제를 선택하고 소재를 선정하고 전체적인 의미를 추구함에 있어 인생과 존재의 해설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직접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방법에서 한 철학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직접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방법에서 한 철학자가 된다. 개념 규정과 논증을 통하여, 또 발견과 종합을 통하여 인생과 존재의 완성된 통찰을 구성하는 철학자는 캔버스에 맞서는 화가와 같이 경험 전체에 붓을 대고, 교향곡을 작곡하는 음악가와 같이 지성을 동원하고, 산문적 표현일지라도 시인과 같이 시작에 골몰한다." - Irwin Edman, Arts and the Man(1929) 가운데
 
분명 예술가에 대한 과도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말한다. 예술에 대한, 그리고 예술가들에 대한 철학적 고찰, 대체로 미학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영감을 통한 순수한 활동에 미학은 그다지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 허나 모이어의 언급은 괜찮은 생각꺼리일테다. "미학(이지적 활동)은 오로지 예술가(상상적 활동)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지적 말이다.
 
예술에 대해, 예술가에 대해 생각하는 미학은 예술 그 자체와 세상에서의 과거 흔적을 통해 사람의 어떤 부분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인간의 미적 생활과 그 생활의 원인과 조건"에서 미학의 존재 의의를 설명하는 모이만의 설명처럼 말이다.
 
우리는 '학자의 손에 의한 미학'은 배격해야 하지만, 예술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밑그림이 되는 사람을 통해, 우리 인간 세상의 몇몇 부분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론은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이유는 뭘까? 정말 도움이 될까? 어떤 도움이 될까? 왜 도움이 될까? 예술은 프로이트의 언급대로 리비도의 '승화작용'에 불과하다면, 예술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그리고 이 '승화작용'의 결과물들이 모여, 세상에 하나의 흐름을 가져다주는 우리네 세상의 모습은 또 어찌 설명할까?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이 아닐까? 흔히 논해지는 '엄격한 의미', '엄격한 구분'은 무엇일까?
 
흔히 우리가 나누어 놓은 예술의 분류는 옳은 것일까? 이러한 틀이 깨어져 가는 우리는 '포스트모던'적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며'해체'와 '재구성'을 논한다. 애초에 구분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에 뒤 따라야만 하는 걸까?
 
이 땅에서의 예술은 어떠했을까? 사대부와 화인들의 '국죽매란'을 그린 그림, 어우동의 '소리', 황진이의 '시', 아랫 사람들의 예술은 어떤 것이었을까? 예술은 누군가의 특권이자, 여유로움의 표현이었을까?
 
 
< 故조요한 선생님의 글 읽고, 몇 부분 따와서 생각 정리하기. >
 
 
추가>
 
리비도에 대해 단순한 '성욕'으로만 여기지는 말자. 리비도란 삶의 본능이다.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그 반대에 서 있다. 이 둘의 총체적인 것이 인간 근원을 만든다. 흥분하여 마스터베이션과 섹스를 죽기 전까지 하는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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