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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4일 수요일

필통넷 주민회의 "청춘 연구 모임"



#모임 소개

     우리는 온라인 학습 생태계 필통넷(http://filltong.net)에 거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전파와 케이블이 연결해주는 세상을 벗어나, 목소리와 표정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모임은 필통넷 주민들이 사람살이하며 가진 스스로의 질문들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풀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모임 의도

     우리는 '청춘'입니다. 푸르른 봄 날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슬픈 이름과 G세대라는 허울 좋은 의도의 이름로 규정되기도 합니다. 어떤 누군가는 우리의 삶이 푸르른 봄 날이 아니라고 합니다. 20대는 88만원 세대도 모자라, 44만원 세대일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걱정이 떠돕니다. 한 편에서는 '너희의 자신감''다양한 경험'은 대한민국이 좁으리라 부러워합니다. 걱정에는 두려워합니다. 부러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어떤 곳인지, 지금은 어떤 시간인지,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해 역사와 철학, 그리고 문화에 대한 여러 텍스트와 영상들을 통해 공부하려고 합니다.



#방식

     세미나는 매 주 다른 주제로 진행되고, '혼자 공부하기''모임을 통한 더불어 공부하기'로 나뉩니다. 주민들은 자신이 가진 질문을 꺼내어 놓습니다. 그리고 함께 읽을만한 책이나, 영상, 소리 등을 알려줍니다.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고, 건네 받은 '같이 알면 좋은 것들'을 스리슬쩍 홀로 느끼는게 '혼자 공부하기'입니다. '더불어 공부하기'는 내 ''로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죠. 일상을 통해 '혼자 공부하기'와 모임을 통해 '더불어 공부하기'를 하는 것이 주된 우리의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이번 '필통넷 주민 모임'은 연령으로 본다면 10대에서 30대까지, 학제 구분으로 본다면 중학교에 다니는 이부터 대학을 졸업한 이까지, 서로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모여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라는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야기에 곁들여지는 '', '영화', '음악', '그림'과 같이 '같이 알면 좋은 것들'을 통해 우리 바깥의 타인의 시각에 대해서도 상상해봅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에 가야하는건가?'라는 질문을 가진 가재의 이야기 시간입니다. 얼떨결에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계속 다녀야 하는지를 혼란스러워하는 날아와 대학을 졸업한 POD와 올 해 갓 대학에 들어간 담_이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가재와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Byism이 권해준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라는 영화 속의 68혁명 이 후의 프랑스 대학생들의 모습과, 날아가 권한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는 형식입니다.



     10주 간의 기간 동안, 하루 하루 만들어 낸 이야기들은 http://filltong.net 에 기록을 남길 예정입니다.



2010년 2월 26일 금요일

번개

#낭독번개

방에서 나와 책 읽기

(만약 운동회를 못한다면 혹은 다음 기회에)

연락처
(날아 / 김소준철 : 010.9291.1859)

#1 언제 만나서 놀까

시간: 2010년 2월 28일 2시 반
참가자 최소 인원: 3명
먼저 만나는 장소는 홍대 역 4번 출 에서!

그리고 장소 2안 으로 이동합니다.
장소 2안 기억해주세요!


#2 뭐하고 놀까

책 읽고 놀지요.

나도 사실 혼자 조용히 책 읽는게 더 좋아요. 그런데 매번 눈으로만 읽으니까 종종 지루해져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고 말이죠. 게다가 누군가 책을 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그래서 다른 이들과 책 읽는 시간이 가끔 필요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책을 읽어주는 그런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야기해봅니다. 입으로 읽고, 소리로 읽는 그런 책읽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꼭 모두가 읽을 필요는 없어요. 읽고 싶은 사람은 읽고, 듣고 싶은 사람은 듣고, 어떤 규칙에 매이지 않는 그런 책 읽는 시간이기를 바래요.

작은 규칙 정도는 갖는게 좋겠지요? 한 사람이 책을 읽는 시간을 정한다거나, 말을 할 때는 어떤 신호를 한다거나 이런 것들은 같이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준비물은 '읽을 책 한 권'이죠. 더 준비하고 싶은 사람들은 '깔고 앉을 것', '틀어 볼 음악', '먹을꺼리' 정도가 있을테지요. 나처럼 더 더 준비하고 싶은 사람들은 '음악을 틀 때 필요한 스피커', '마이크나 확성기'를 준비하면 될 것 같아요.



#3 어디서 놀까

(예정: 당일 상황을 보고 정하기, 미리 알아보고 연락드릴께요.)

1안> 홍대 앞 놀이터 장소
2안> 동교 치안센터 옆 놀이터
3안> 상상마당 너머 벤치 있는 작은 공원

* 다음로드뷰를 누르면 사진을 볼 수 있어요.

장소 1안> 홍대 앞 놀이터 (다음로드뷰)


장소 2안> 동교치안센터 부근 놀이터 (다음로드뷰)


3안> 상상마당 너머 벤치 있는 작은 공원 (다음로드뷰)



#4 어떻게 놀까

일단 만나서 놀이터에 가서 어떻게 책을 읽을지를 정해봐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그 방법대로 책을 찬찬히 읽어봅시다. '즐겁게 놀자'가 '어떻게 놀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인 것 같아요.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책 읽기

책 읽기는 빼놓지 않는다.

읽는 책은 거의 매일 바뀐다. 이틀 정도면 한 권의 책은 대개 읽는다. 그래서 책이 자주 바뀌는 편이다. 애초에 명확히 책과 책을 구분하지 않기에, 교과서가 아닌 이상 넓은 범주로 두고 책을 읽으려고 한다. 이 말은 문학과 비문학, 교양서, 경영서, 철학서, 사상서와 같은 문고식 분류로 책을 읽지 않는 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고르는 건, 제목과 서문을 읽고 고른다. 허나 책과 책 사이에 어느 정도 관계가 읽는 책을 읽는다. '올리버 트위스트(찰스 디킨스)'를 읽으면, 그 당시의 산업혁명에 관한 역사를 조금 읽고, 벤담이나 밀에 관한 부분을 조금 더 읽고, 그 이후의 기술사를 읽거나, 소공자를 읽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정신없는' 책 읽기를 하면 좋지 않다는 말도 있다. 이는 각 분야에 따라 책읽기 방식이 다른데, "서로 다른 서술 방법을 같은 방법으로 읽는 건 아니야?"라는 질문일 수도 있을테다. 어차피 책이 쓰이는 방식은 '같은 분류'라 해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분류하기에 따라 책 읽기를 결정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서문을 읽는다. 서문을 읽고, 역자의 소개를 읽으면 "이 책은 어떻게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하나의 주제, 혹은 시대상, 어떤 흐름을 읽는데 방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책을 읽는 다는 건 어떤 이의 생각을 만나는 셈이니 "어떤 분류의 책은 어떤 책 읽기"를 해야해라고 하는 건 무의미 할 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요즈음 어떤 마음으로 지내는지는 책을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관심사는 분명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오늘의 책은 http://book.filltong.net/isbn/890806009X "시지프의 신화 (알베르 까뮈, 범우사)"다.


내 문제는 책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주요하다 싶은 문장을 필통에 올린다. 하지만 아무리 적어도 내 생각이 아닐 수 있다. 이해하고, 동의 하지만, 내가 까뮈가 아닌 이상, 까뮈와 내 생각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제 이 상황에서 내 생각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 사람의 생각을 정리를 하며, 내 생각을 덧붙여야 하는지, 내 멋대로 쓰다가 괜찮다 싶은 문장 몇 몇을 더해야 할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 않는게 더 큰 문제이긴 하지만, 두 방법 모두 해보고, 내가 마음 편한 글쓰기를 해야겠다.

어찌되었든 생각을 글로 적는 다는 것도 복받을 일이다.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민주주의의 모델 (미완)

민주주의의 모델. 정가: 10000원; 판매가: 9500원(5% 할인); YES포인트: 100원 (1% 적립) + 마니아추가적립 안내. 5만원이상 구매시 2천원 추가적립 추가적립이란? ...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이 다른 번역자에 의해 출간될 예정이다. 2009년 하반기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12월의 첫 주인 오늘까지 아직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데이비드 헬드는 첫째, 오늘날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어디에 입각해있는가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말하는 현상을 주목하면서, 고대 그리스로부터 현재까지 대다수의 정치사상가들이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 둘째, 고대 그리스에서 18세기 유럽과 북미에 이르는 대개의 기록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는 백년이 안되며, "창조하고 유지하기에 극히 어려운 통치형태"라고 말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그의 눈길을 끌었으며, 되려 당혹감을 자아낸다고 글의 서론을 시작한다. 그에게 이러한 아이러니가 민주주의의 모델에 대한 연구의 시작이었음을 말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서론에서 '민주주의'의 뜻을 어원적으로 찾으며,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개념이 분명해보이지만, 혼돈스럽다고 말한다.

"인민에 의한 지배"
'인민'
* '인민'으로 분류될 사람은 누구인가?
* '인민'에게는 어떤 형태의 참여를 부여하겠는가?
*"참여에 유리한 조건들로는 어떤 것을 가정해 볼 수 있겠는가? 참여의 비용과 이득, 또는 보상(incentive)과 억제는 평등하게 돌아갈 수 있는가?

'지배'
* '지배'의 범위를 얼마나 넓게 또는 좁게 해석할 것인가? 혹은, 민주적 활동의 고유 영역은 무엇인가?
* '지배'라는 말의 범위가 '정치적'인 것에 해당한다면, '정치적'인 것의 의미는? 그것은 법과 질서, 국가들간의 관계, 경제, 가정(家庭) 혹은 개인적 영역 중에서 어느 곳에 적용되는가?

'인민에 의한 지배'는 복종의 의무를 수반하는가?
* '인민'의 지배는 복종되어야만 하는가? 어느 부분에서 복종하고 어느 부분에서 저항할 것인가?
* 자칭 그리고 실제로 '비참여자'인 사람들에게는 어떤 메카니즘을 만들어 참여로 유도할 것인가?
* 어떤 상황하에서 민주주의는 그들 인민의 일부분 또는 정당한 지배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받는가?


이 사진은 본 책의 13P 서론에서 분류된 '민주주의의 변형들'이다.

"4개의 고전적 민주주의 모델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사상, 자유민주주의의 두 유형 - 보호민주주의와 발전적민주주의-, 맑스주의적 직접민주주의 관념', 치열한 정치적 토론과 갈등을 산출해 온 4개의 현대적 민주주의 모델(경쟁적 엘리트 민주주의, 다원주의, 법치적 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를 고찰한다."

문화진화론

#1 문화진화론 / 사회진화론 / 사회진화주의 / 사회적 다위니즘(Social Darwinism)

   19세기의 구미에서는 인류발달단계의 최하위로 평가된 사람들/집단을 '야만'으로 정의하고, 야만 - 미개 - 문명 이라는 단계를 설정하는 문화 (사회) 진화론이 정착하였다. 이 진화주의적 해석을 고전적 문화(사회)진화론이라 부르기로 하자. 20세기에 들어서자 前 세기에 거론된 '문화정도'의 우열이 아니라, 기술 수준이나 사회의 통합범위를 규준으로 인류의 문화, 사회 전개를 고찰하는 문화(사회) 진화론이 정착하였다.

   문화(사회)진화론의 공헌은, 인류의 문화/사회 전개에 관해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실증적이론을 제공한 것이다. 문제점으로는 19세기 말까지의 고전적 문화(사회) 진화론의 인종차별주의에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인식론을 학계 안팎에 퍼뜨리고, 식민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학문적으로는 이러한 측면들이 부정되고 있지만, 여전히 자유주의 경제의 암묵적 논리로 작용하고 있다.)

고전적 문화 사회 진화론의 주요한 사례
퍼거슨 : 수렵사회 - 방목/유목 사회 - 농경사회 - 산업사회
모건 :    야만단계 - 미개 단계  - 문명단계
차일드:  채집수렵사회- 농경 사회 - 문명사회

19세기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으며, 이 이론은 당시의 생물진화이론과 마찬가지로 인류 문화와 사회도 원시적 차원에서 더 진보된 고차원으로 단계적으로 진화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18세기의 몽테스키외에서 19세기 후반의 타일러까지 일관된 견해였다. 모건과 타일러는 인류정신의 동질성 psychic unity을 전제로 했고, 스펜서[footnote] 다윈이 말한 생물학적 변화, 즉 '환경적응에 의한 변천을 가져오는 유래'라는 현상을 진보적 변화, 즉 진화라고 명명했고, 인류문화와 사회의 변화(진화)에도 생물의 변화 혹은 진화와 같은 이론이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허나 이는 궤변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생물학적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진화'라는 학문적 전제는 현재에는 부정되고 있다. 허나 현재에 와서 '우승열패', '약육강식'과 같은 논리는 '지배'와 '약탈' 등의 정당화하는 구실로 쓰이고 있다.[/footnote][footnote] 20세기 초에 보아스학파가 문화상대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개별론'이라 불리는 것과 같이, 집단, 지역을 넘어선 인류문화와 사회 차원의 비교 연구를 어렵게 만든느 측면이 있었다. 이제 20세기 중반을 살펴보아야 한다. [/footnote] 등은 '인종'간에는 타고난 우열이 있다는 입장이었다.

1950년대 이후의 문화 사회 진화론
살린즈:  밴드사회[footnote]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를 비교하였다. 엘먼 서비스는 사회조직에 대해 '기능론적' 관점을 도입하여 설명한다. 밴드 사회는 친족,혼인,지연유대가 특징인 사회이다. 그리고 수렵채집사회에서 보이는 유동적인 거주집단이다. [/footnote] - 부족사회 - 수장제사회 - 국가사회
프리드:  평등사회 - 지위사회 - 계층사회 - 국가사회

'신진화론'이 등장한다. 이는 화이트의 에너지 소비 이론과 스튜어드의 환경/기술 복합 이론이다. 그리고 서비스, 살린즈, 해리스 등이 이 이론을 보다 세련되게 다듬었다. 이들의 이론에는 '인구 증가'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인구증가가 기술적 진전을 촉진하였는가 아니면 기술적 진전이 인구증가를 가능하게 하였는가라는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를 낳긴하지만) 질문이 공통된다. 허나 이 이론들은 인구증가와 기술적 전진, 보다 포괄적인 사회통합에 의해 인류사회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해명했다.

'진화'가 주는 서열화의 느낌보다 '역사적 문화,사회 전개'라는 용어와 같이 '서열화'의 느낌을 더는 용어를 쓰는 것은 어떤가? 개념에 대해, 그리고 용어에 대해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라딘]문화인류학의 20가지 이론 의 '문화진화론' 부분에서의 발췌 및 재정리

문화 인류학의 20가지 이론 (아야베 쓰네오 엮음, 일조각, 2006)

이론들의 역사적 시작과 전개과정, 기본개념 설명, 주요 학자들과 저서 소개 등을 통해 각 이론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이 철학, 역사학, 사회학, ...


   "인류학 연구자에게 '실천'이란 원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중략 - 말리노프스키처럼 연구 대상지역에 장기 체류하여 현지인들과 같은 조건에서 생활하며 참여관찰을 하는 현지조사가 문화인류학자가 되는 데 필수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현지조사는 문화인류학 연구자에게는 실천이라고도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실천론이 요구하는 바가 단지 현지조사 경험과 치밀한 민족지 구축이 아니라 더 나아가 문화의 주변적 소수자를 '구제'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비유컨대 이학에서 공학으로 가는 만큼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 절충해서 현지조사를 자기표현의 실존적 실천으로 그치는 것도 한 방법인지 모른다. (P7-8)"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의 제목은 '현대 문화인류학의 이론과 과제' 정도가 될 것이다. (P9)"


문화진화론 / 문화전파주의 / 기능주의 / 문화상대주의 / 구조주의 /
맑스주의와 문화 인류학 / 인식인류학 / 상징인류학 / 해석인류학 / 현상학과 인류학

에스니시티론 / 환경인류학 / 의료신체론 / 젠더론 / 개발론 /
탈식민론 / 관광인류학 / 다문화주의론 / 민족지론 / 실천론



2009년 12월 3일 목요일

책 한 권 읽는 일요일 소개글





   우리는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책 한 권 가까이 하기 힘들 정도로 바쁘지요. 설혹 쉴 수 있는 짬이 난다 해도 그간의 노동 혹은 사건들로 지친 몸을 쉬게 하는데 쓰이지요. 생각의 여유는 줄어듭니다. 그리고 생각의 폭 역시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그저 짧고 편한 생각에서 나오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이유를 지어내 답으로 여기고 살 뿐입니다. 물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허나 우리를 자기 밖에 모르는 욕심어린 사람으로 이끌 '왜곡'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기에 고쳐 나가야 할 점입니다. '일요일에 읽는 책 한 권'은 생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지닐 왜곡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한 순간입니다.

클럽 - http://club.filltong.net/readingclub/

내가 잘 읽지 않는 책

내가 잘 읽지 않는 책,
 
영성과 관련된 책,
자기계발과 관련된 책,
경영과 관련된 책,
개인의 일대기 혹은 전기,
애국주의에 기대는 책,
여행기
 
 
   영성과 관련된 책은 어느 순간부터 잘 읽지 않게 되었지요. 영성, 오로빌에 다녀와서 생각해보았지요. 어떤 이의 가르침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르침을 내가 직접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요. 그 이후로는 잘 읽지 않게 되었지요. 그 가르침을 만든다는 것, 뭐 스스로의 종교를 만든다기보다는, 내 믿음으로 세상 속에서 나를 하나 하나 찾으며 살아가보자라는 정도에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무언가 신적인 존재에 대한 찬양과 인간 군상들에 대한 무한한 믿음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차라리 구체적인 내 삶을 그려나가고, 발견해나가는게 더 즐거운 것 같아요!
 
   자기계발과 관련된 책, 대개의 자기계발서들이 응용심리학, 혹은 경영에 기반한 것들, 사람을 대상화하는 측면이 많은 듯 해요, 그리고 결론은 대개가 비슷하고요. 사람을 대할 때 편견을 가져오는 건 아닐까, 경쟁적인 측면에 너무 집착하는 건 아닌가,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을 방법만 모색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읽지 않게 되었지요. 경영도 비슷해요. 예전에 다독을 할 때, 삼성의 경영 기법, 이건희, MS, 온갖 기업 경영 책을 읽었는데 남는 건,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건데? 앞서나가는게 뭔데?"라는 삐딱한 생각이 들었었지요.
 
   개인의 일대기와 전기는 이제는 읽고 싶어졌어요. 세상의 틀을 바라보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해졌다고 할까나요. 읽어 본 전기는 @얌체공 의 책 구겐하임, 김산의 아리랑, 전태일, 이상, 김수영, 뭐 이 정도에 불과해요. 아, 필통에서 선물해 준 로맹가리도 있고요. (구겐하임과 로맹가리는 글을 써야하는데..시간이 없네요.) 사람들의 모습, 이제는 찾아보려고요. 어떻게 살았는지, 왜 그렇게 살았는지, 궁금해져요.
 
   애국주의에 관한 책, 나는 위에서 부터 만들어지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사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사회의 하나로 살아간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만들어 낸,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은 사회에 대해 관심이 있어요. 주어진 사회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고, 그 동안의 실수들이 하나 하나 남아 있거든요. 그 실수를 최소화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은 정말 모르겠네요. 저도 자본주의의 수혜를 많이 받고 자란 일종의 "축복받은" 사람 중 하나이니까요. 돈에 대해 어려움을 느낀 시절은 그리 길지 않고, 돈이 가져다 주는 풍족함을 더 많이 받고 자란데다, 지금 원하는 것들도 어찌보면 비싼 값을 주고 사야하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사람을 눈에서 잊어버리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자하는게 지금의 숙제에요.
 
   여행기, 나는 여행을 다녀요. 여행기를 읽지는 않아요. 여행자가 위대해보이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내가 다녀온 후에야 읽고 싶어서요. 대개의 여행기는 어디가 좋다, 어디가 좋았다, 무엇이 좋았다, 추천할 만 하다 정도의 내용인데, 나랑은 관련없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대개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상상을 하느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아요. "멋지다" 정도의 상상이 많지요. 서울을 거닐면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왜 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요즈음 조금씩 나오기는 하지요.) 그리고 쇼핑의 천국, 지금은 죽어 돈벌이로만 살아있는 유적의 모습에만 관심있는 책들은 정말 별로에요. 왜곡에 왜곡만 가득할 뿐. 차라리 "사람 풍경 (김형경)" 같이 스스로의 생각을 소소히 적는다면 모를까요?





故 조요한 님의 '예술철학'을 읽고, 이어지는 생각 아주 조금과,



"만일 예술가가 단순히 천부의 재질로써 노름삼아 하는 장인이 아니라면, 예술가는 주제를 선택하고 소재를 선정하고 전체적인 의미를 추구함에 있어 인생과 존재의 해설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직접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방법에서 한 철학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직접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방법에서 한 철학자가 된다. 개념 규정과 논증을 통하여, 또 발견과 종합을 통하여 인생과 존재의 완성된 통찰을 구성하는 철학자는 캔버스에 맞서는 화가와 같이 경험 전체에 붓을 대고, 교향곡을 작곡하는 음악가와 같이 지성을 동원하고, 산문적 표현일지라도 시인과 같이 시작에 골몰한다." - Irwin Edman, Arts and the Man(1929) 가운데
 
분명 예술가에 대한 과도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말한다. 예술에 대한, 그리고 예술가들에 대한 철학적 고찰, 대체로 미학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영감을 통한 순수한 활동에 미학은 그다지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 허나 모이어의 언급은 괜찮은 생각꺼리일테다. "미학(이지적 활동)은 오로지 예술가(상상적 활동)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지적 말이다.
 
예술에 대해, 예술가에 대해 생각하는 미학은 예술 그 자체와 세상에서의 과거 흔적을 통해 사람의 어떤 부분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인간의 미적 생활과 그 생활의 원인과 조건"에서 미학의 존재 의의를 설명하는 모이만의 설명처럼 말이다.
 
우리는 '학자의 손에 의한 미학'은 배격해야 하지만, 예술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밑그림이 되는 사람을 통해, 우리 인간 세상의 몇몇 부분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론은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이유는 뭘까? 정말 도움이 될까? 어떤 도움이 될까? 왜 도움이 될까? 예술은 프로이트의 언급대로 리비도의 '승화작용'에 불과하다면, 예술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그리고 이 '승화작용'의 결과물들이 모여, 세상에 하나의 흐름을 가져다주는 우리네 세상의 모습은 또 어찌 설명할까?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이 아닐까? 흔히 논해지는 '엄격한 의미', '엄격한 구분'은 무엇일까?
 
흔히 우리가 나누어 놓은 예술의 분류는 옳은 것일까? 이러한 틀이 깨어져 가는 우리는 '포스트모던'적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며'해체'와 '재구성'을 논한다. 애초에 구분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에 뒤 따라야만 하는 걸까?
 
이 땅에서의 예술은 어떠했을까? 사대부와 화인들의 '국죽매란'을 그린 그림, 어우동의 '소리', 황진이의 '시', 아랫 사람들의 예술은 어떤 것이었을까? 예술은 누군가의 특권이자, 여유로움의 표현이었을까?
 
 
< 故조요한 선생님의 글 읽고, 몇 부분 따와서 생각 정리하기. >
 
 
추가>
 
리비도에 대해 단순한 '성욕'으로만 여기지는 말자. 리비도란 삶의 본능이다.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그 반대에 서 있다. 이 둘의 총체적인 것이 인간 근원을 만든다. 흥분하여 마스터베이션과 섹스를 죽기 전까지 하는 것만은 아니다.

케인즈에서 하이에크로

케인즈는 시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케인즈가 바라보는 시장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이 혼합된 경제의 장이다. 과거의 고전적인 경제학자들의 공공으로부터 "방임"된 상태의 시장은 실패했다는데서 이 생각은 시작되었다. 거시경제적 흐름이 미시적 행동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은, "불황 시기에 정부가 지출을 늘리면 보다 많은 돈이 유동되므로 시민들의 소비와 투자가 유도되어 경제가 정상 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이 케인즈의 주장이다"라 적은 부분에 해당되는 말이다.

"경제적 과정을 잠재 생산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보는 18세기 후반 이후 고전 경제학자들의 관점과는 달리, 케인즈는 (특히 불황기에) 경제를 이끌어 가는 요소로서 상품에 대한 총수요를 강조했다."

경제적 과정은 생산을 조절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수요를 조절함으로써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닐까?

불황이다. 사람들이 돈이 없다. 그러면 정부가 돈을 푼다. 이 돈을 통해 시민을 물건을 산다.

미친듯이 생산해냈다, 1030년대 미국은. 허나 "포드주의적 생산체계가 가져온 거대한 일반적 생산성의 상승에 의해 공급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었던 반면, 수요는 상대적으로 정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번영의 토대는 대단히 취약"했다. 정부의 적자지출, 자본이 없을 때는 저축이 이롭지만, 실업률이 높아질 때는 절약이 경제성장을 침해한다. 시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

케인즈주의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당시의 해결책이었다.

전후로 계속하여 케인즈주의는 정책적 우위를 점한다. 60년대 리차드 닉슨은 '지금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허나 이 때의 하이에크는 케인즈에 비해 빛을 발하지는 못 한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주의적 사민주의에 대해 계속하여 반발한다. 비판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73년 오일 크리시스, 74년 하이에크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

포디즘의 한계인가, 케인즈주의의 실패인가, "공급"의 긴장, 공급의 긴장은 무엇인가?

포디즘을 통해, 기업과 자본가들은 끝없이 기계설비를 계속하여 늘려나갔다. 생산성이 줄어들었다. 여기에서 포드주의의 실패, 즉 노동조직원리의 위기가 드러난다. 노동자들은 기계가 늘지만, 임금은 그리 많이 오르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임금을 인상하려 시도한다. 기업가들은 수익성 위기를 맞는다고 한다. 기계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값은 싸지니, 상품을 늘리면 늘릴 수록, 값은 싸지니 공장은 수익이 준다. 노동자 또한 수익이 줄어든다. 악순환이다.

노동자는 저항한다. 기업은 가격을 올린다. 가격이 오르고, 임금은 오른다. 인플레가 생겨난다. 돈의 가치가 줄어든다. 같은 만원이어도, 지금의 만원과 예전의 만원은 다르다. 이제는 탕수육을 못 먹는다.

여하튼 수치상으로의 물가가 오른다. 이러한 인플레에다, 게다가 실업률은 높아지고, (장사가 안되니 사람들을 그만두게 한다), 경기는 안 좋아진다. 이게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이런 상황이다. 여기에서 왜 신자유주의의 하이에크가 나왔나?

구춘권의 설명이다. "포드주의적 축적체제는 한마디로 케인즈주의적 사회국가의 개입에 의해 실현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의 추종자들은 포드주의의 실패, 즉 국가 개입의 실패를 빌미로 시장을 자유로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발생했고, 미국과 영국 시작했고, 프랑스, 남미에로 계속되었다. 답은 신자유주의였다. 이 말은 맞는가? 아니 그들의 선택은 신자유주의였다. 국가의 개입, 국가는 더 이상 생산과 소비에 대해 손을 댈 수 없다. 이것이 탈규제와 시장을 통한 조절로 대체된다. 시장의 힘은 말 그대로 자유로와진다. 국가가 재편된다.(설명 필요) 국가들은 스스로에게 알맞는 생산 체계를 만들어낸다.
 
레이건의 말을 보자,

레이건의 연설 (83년 세계은행 연례회의)
"가장 단기간에 가장 극적이고 전반적인 경제적 진전을 이룬 사회들은 가장 규모가 큰 곳도, 가장 자원이 풍부한 곳도, 그리고 당연히 가장 엄격한 통제를 받은 곳도 아니었다.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시장의 마술을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각자 독자적인 결정을 수행하는 수백만 명의 개인들은 늘 그 어떤 중앙화된 정부 계획 경제 과정보다도 자원을 더 잘 분배할 것이다."

하이에크의 철학은 두 가지 입장에 근거한다.

"첫째, 문명의 성장은 사적 소유권이라는 맥락에서 제각각 목적을 추구하는 구성원들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사회제도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시장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협동을 통해 도출될 때 가장 잘 작용한다. 시장경쟁은 '인간계획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산물인 경제적 질서('조화cosmos')를 발생시킨다.
둘째, 그러므로 정부는 자신의 통제력, 특히 억압적인 권력이라는 영역에 제한을 두고 한정시켜야 하며 민주적이어야 한다. 계획된 경제 질서들('배열taxis')은 어느 정도를 넘어선 복잡성을 다룰 수 없다. 특히 집단주의적 경제계획 (사회민주주의적 유형이라 하더라도)은 불가피하게 전체주의적 독재로 이루어진다."
(P37, 리처드 피트, 불경한 삼위일체,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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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케인즈주의, 흔히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이야기는 공산주의라는 것의 위협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불경한 삼위일체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 자기규제적 시장과 기업가 정신을 우선시하는, 보수적이지는 않되 우익적인 사고에 기초한 신념으로 짜여진 완결적인 구조"다. 그리고 "19세기 영국의 '고전적인' 자유주의 신념을 새롭게 갱신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19세기의 고전적인 자유주의는 홉스, 로크, 흄, 아아담 스미스의 17,18세기의 자유주의적인 관점을 다듬은 형태이다.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커트 보네거트가 말하는 단편 소설을 쓸 때 필요한 여덟가지 규칙

커트 보네거트가 말하는 단편 소설을 쓸 때 필요한 여덟가지 규칙


1. (글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읽는다.) 알지 못하는 낯 선 사람들의 시간을 사용하는 셈이니 말이다. 글 읽는 사람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2. 적어도 글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는 글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글에는 뭔가를 원하는 인간들이 나와야 한다. 단 한 잔의 물이라도 좋다.

4. 글에 등장하는 인물을 뚜렷히 밝혀나가거나, 사건을 계속 진행시키거나, 모든 문장은 이 두 역할 중에서 하나를 취해야 한다.

5. 가능하다면 말이지, 글의 마지막 부분과 유사하게 글을 시작해라.

6. 사디스트가 되라.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글 속의 인물이 있다해도 말이지, 얼마나 지랄맞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줘라. 글을 읽는 사람들이 글 속의 인물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를 알 수 있도록 말이다.

7. 단 한 명의 '그대'를 즐거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라. 창을 활짝 열고, 온 세상을 사랑하는 글을 쓰면 말이지, 폐렴걸린 글이 되어버린다.

8.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재빨리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서스펜스' 따위는 버려도 좋다. 바퀴벌레가 마지막 몇 몇 페이지를 갉아먹었다고 해도, 글을 읽는 사람들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디일지, 왜일지' 같은 것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김소준철 옮김, 01 DEC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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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rding to Wikipedia, these are KV’s eight commandments:

  1. Use the time of a total stranger in such a way that he or she will not feel the time was wasted.
  2. Give the reader at least one character he or she can root for.
  3. Every character should want something, even if it is only a glass of water.
  4. Every sentence must do one of two things—reveal character or advance the action.
  5. Start as close to the end as possible.
  6. Be a Sadist. No matter how sweet and innocent your leading characters, make awful things happen to them—in order that the reader may see what they are made of.
  7. Write to please just one person. If you open a window and make love to the world, so to speak, your story will get pneumonia.
  8. Give your readers as much information as possible as soon as possible. To hell with suspense. Readers should have such complete understanding of what is going on, where and why, that they could finish the story themselves, should cockroaches eat the last few pages.

고전 번역본 추천, 그리고 책 서평 이야기 살펴보는 법

고전 번역본


고전의 경우 번역본이 많다. 그 중에서 괜찮은 번역본을 찾는 것도 일이다. 정말 일이다. 유토피아 (토마스 모어)를 읽고 싶다고 치자. 무얼 읽어야 할 지 헷갈린다. 출판사도 많고, 번역자도 많다.

 

웹을 검색하는게 속 편하다. 구글링을 하면, 유토피아에 대한 여러 사람의 리뷰들이 있다. 그 중에서 괜찮겠다 싶은 번역본을 고른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두 세 종류의 번역본을 비교하며 읽어보는게 좋다. 시간이 없을 경우, 꽤 괜찮은 평을 한다는 블로거의 의견을 믿어보는 것도 가능할테다. 물론 직접읽는게 가장 나을테다. (유토피아의 경우 범우사에서 번역된 책이 그나마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뭐 여하튼 웹 검색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고전의 경우에는 교수신문의 '최고의 번역본을 찾아서'를 참조하는 것도 좋다.

 

책도 있다.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1, 2

1:  http://www.yes24.com/24/goods/2129925

2:  http://www.yes24.com/24/goods/2534795

 

그리고 이 리스트를 교보문고에서 정리해놓은 것도 있다.

교보문고 정리: http://www.kyobobook.co.kr/event/eventViewByPid.laf?eventPid=6156&classGb=RKO&mallGb=RKO&linkClass=00000000&fromGb=recommend&orderClick=GCD

 

번역본의 경우, 몇 가지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번역본은 '아무거나' ('아무거나'는 아무 생각 없이, 책 제목을 찾아 고르는 것 정도로 풀어내자) 고르면 안된다. 적어도 본래의 언어를 직접 번역한 것이 좋다. 영어본인 아닌 책인 경우, 특히 그렇다. 원어를 직접 번역했다고 해서 무조건 믿어서도 안되긴 하다. 그 사람이 참조한 레퍼런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게 좋다.


또, 책을 번역한 사람의 의도도 분명 반영되어 있기에, 번역한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아마 책 안의 '옮긴 이의 글'이나, 번역자의 다른 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서평에 대한 이야기


블로그가 유행인 얼마 전, 각 블로그 사이트마다 글 잘 쓰는 블로거들에게 '네이버 후드'니 뭐니 하는 '수상'을 하곤 했다. 대부분의 서평가들이 글을 잘 쓴다. 어떤 이는 담담하게, 어떤 이는 폼나게, 어떤 이는 솔직하게 자기가 아는 만큼을 그대로 적고는 한다.


서평은 내 책읽기에 대한 보조 수단이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서평, 옛 기억에서는 '독후감'으로 일컫을 수 있는 글을 써보아야 한다.


강유원 (http://allestelle.net), 로쟈 (http://blog.aladdin.co.kr/mramor) 등의 서평가의 블로그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해란(http://blog.naver.com/mjyoon6708), 이네사(http://blog.naver.com/inessa9) 등의 블로거의 글도 참조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수서평 블로그 모임 (http://maehok.tistory.com/306)이라는 글도 있다. 이 블로그에는 '해란', '이네사', '로쟈'의 블로그를 비롯한 리스트가 있다. 이 중에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블로거도 있다. 블로거마다 분명 각기 다른 특징이 있다. 이 특징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앞에서도 적었지만, 사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다. 책은 스스로의 생각을 통해 만들어진 목적으로 읽는게 좋다. 그게 쉬기 위한 것이든,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기형도


얼마전, '책 한 권 읽는 일요일' 모임에서 '기형도 전집'을 2주간 걸쳐 읽었습니다.

누군가 "가을이다, 11월, 일찍 죽은 천재에 대해 읽자"고 말했어요. 그래서 나는 '기형도'를 말했지요. "기형도는 천재야."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천재라는 사람의 의미도 사실 잘 모르지만요. 음, "기형도는 천재는 아닐 것 같아."정도의 생각이에요.

그가 천재건, 아니건, 분명한건 죽었지만 아직도 회자되고, 다시 그의 글이 다른 방식으로 또 살아나는 현상이 너무 기이해서였지요. '절망'을 입에 달고 다닌 사람이, 이 시기에 다시 회자된다는 것, 그가 우리에게 남긴 '기형도'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은 왜 인지 21세기 각박한 지금에도 꽤나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건 뭐 근거도 없이, 그냥 난 이렇게 생각해라고 내지르는 글이라서 아쉽네요. 아직 정리가 잘 되질 않습니다. 그에 대해 무어라 써야 하나 말이지요.)

어찌되었건, 기형도는 죽고 난 후,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르고 흘러 지금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시가 실리기도 하고, (7차 교육과정에서 '홀린 사람', '빈집'이 실렸다지요.), 영화와 연극, 소설, 노래 등 각 예술에서 다시 살아났지요.

각설하고, '책 한 권 읽는 일요일' 모임을 위해 만들었던 '성석제'씨가 쓴 기형도에 대한 글을 재가공한 자료 하나를 내놓습니다. 조금 줄이고, 또 조금 늘렸답니다. 성석제씨의 글쓰기에 손을 대서 죄송하고, 또 부족함 투성인지라 도망가고 싶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싶어서요. 읽기 보다 편하게 바꾸어놓았어요. (제 생각에는요.)

기자 기형도에 대한 모습을 조금 늘리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기형도의 동료의 글들을 조금 떼다 붙였습니다.

언젠가 기형도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럴 만한 생각과 글의 능력으로 제가 나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