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4일 목요일

김C 인터뷰를 읽다가

C의 이야기, 기자가 탁현민 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탁현민은 이러저러한 공연들을 기획해내는, 좋은 기획자 아저씨라고 생각한다.

[출처]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t/

 

뚜렷한 주제는 때때로 그 주제의 프레임 속에 갇히게 만든다. 도구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주제가 옳거나 옳지 않거나 말이다.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분명하게보다는 모호(?)하게, 상징적이기보다는 함의를 중심"이라는 김C의 의견은 그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 위한 방법일테다. (2010. 01. 14. 18:15)

 

혹자는 뭐 이리 말랑말랑해 라고 말하겠지만, 주제와 공연의 실체인 '음악'이 어우러지기 위한 그나마 나은 방법아닐까? (2010. 01. 14. 18:16)

 

우리는 스스로가 주제를 가져야지, 내 주제를 다른 이에게 던지는 것, 타인의 주제를 내 것으로 가져오는 것에만 너무 익숙해진 건 아닐까? (2010. 01. 14. 18:16) 

 

Red Siren 이라는 일련의 공연도 주목할 만 하다. (2010. 01. 14. 18:19)



이 기사와 이어서 http://www.pressian.com/article/serial_article_list.asp?series_idx=449 'Revolu Song'이라는 프레시안의 기획 기사도 재미있다. (2010. 01. 14. 18:21) 

 

 

http://filltong.net/tocs/23806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22 Dec> 오지은 - 화華






오지은 - 화華


 

널 생각하면 목이 말라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나
언제나
니 앞에 있어도 두 살을 맞대어도
숨소릴 들어도 왜

널 생각하면 약이 올라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보물처럼 넌

널 보고 있으면 널 갈아 먹고 싶어
하지만 그럼 두번 다시 볼 수 없어

나의 이성 나의 이론 나의 존엄 나의 권위 모두가
유치함과 조바심과 억지부림 속좁은 오해로
바뀌는건 한순간이니까
사랑이란 이름 아래 저주 처럼

널 생각하면 독이 올라
내 맘속 커져가는 네게 짓눌려

다시는 내릴 수, 멈출 수 없는 기차
섣불리 뛰어내린다면 죽겠지

널 사랑해 누구보다 저 끝까지
마지노선 따윈 없어
전하고 싶어 말하고 싶어 너의 세계가
나로 가득 찼으면

바라는건 나의 삐뚤어진
사랑이란 이름 아래 욕심이야

 

가사 참 독하다. "나의 이성, 나의 이론, 나의 존엄, 나의 권위 모두가 유치함과 조바심과 억지부림 속좁은 오해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니까"라는 가사는 그 중 가장 끔찍하다. 마음이 지닌 믿음들이 겉치레라는 말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이 가사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정말?"이란 궁금증을 갖는다. 알면서 묻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상관없는 것일까. 확인할 마음도 없다.




이 노래를 듣는 건, 꽤나 솔직해서다. 공감하지 않지만,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오지은은 꽤나 솔직하게 노래부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은'이라는 이름이 붙은 앨범들을 듣는다. 무엇보다, 몇 장의 앨범을 내는 모습에서 생각 씀씀이가 부러웠고, 좋았기 때문이다. 솔직한데다, 스스로의 길을 걷는 그 모습이 참 좋다.

앨범에 관한 정보는 http://www.maniadb.com/artist.asp?p=140997 에서 얻을 수 있다.

빛 바랜

빛 바랜 잠바를 입은 아저씨가 터덜 터덜 걷는다. 터덜 터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내 앞에서 생겨난다. 푸석한 머리를 한 아저씨는 차를 피해 힘없는 어깨를 흔들며 걷는다.

옛적 젊은 시절에도 아저씨의 걸음걸이는 터덜터덜 힘없이 늘어진 어깨를 흔들거리는 걸음이었을까?


책 읽기

책 읽기는 빼놓지 않는다.

읽는 책은 거의 매일 바뀐다. 이틀 정도면 한 권의 책은 대개 읽는다. 그래서 책이 자주 바뀌는 편이다. 애초에 명확히 책과 책을 구분하지 않기에, 교과서가 아닌 이상 넓은 범주로 두고 책을 읽으려고 한다. 이 말은 문학과 비문학, 교양서, 경영서, 철학서, 사상서와 같은 문고식 분류로 책을 읽지 않는 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고르는 건, 제목과 서문을 읽고 고른다. 허나 책과 책 사이에 어느 정도 관계가 읽는 책을 읽는다. '올리버 트위스트(찰스 디킨스)'를 읽으면, 그 당시의 산업혁명에 관한 역사를 조금 읽고, 벤담이나 밀에 관한 부분을 조금 더 읽고, 그 이후의 기술사를 읽거나, 소공자를 읽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정신없는' 책 읽기를 하면 좋지 않다는 말도 있다. 이는 각 분야에 따라 책읽기 방식이 다른데, "서로 다른 서술 방법을 같은 방법으로 읽는 건 아니야?"라는 질문일 수도 있을테다. 어차피 책이 쓰이는 방식은 '같은 분류'라 해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분류하기에 따라 책 읽기를 결정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서문을 읽는다. 서문을 읽고, 역자의 소개를 읽으면 "이 책은 어떻게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하나의 주제, 혹은 시대상, 어떤 흐름을 읽는데 방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책을 읽는 다는 건 어떤 이의 생각을 만나는 셈이니 "어떤 분류의 책은 어떤 책 읽기"를 해야해라고 하는 건 무의미 할 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요즈음 어떤 마음으로 지내는지는 책을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관심사는 분명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오늘의 책은 http://book.filltong.net/isbn/890806009X "시지프의 신화 (알베르 까뮈, 범우사)"다.


내 문제는 책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주요하다 싶은 문장을 필통에 올린다. 하지만 아무리 적어도 내 생각이 아닐 수 있다. 이해하고, 동의 하지만, 내가 까뮈가 아닌 이상, 까뮈와 내 생각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제 이 상황에서 내 생각을 적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 사람의 생각을 정리를 하며, 내 생각을 덧붙여야 하는지, 내 멋대로 쓰다가 괜찮다 싶은 문장 몇 몇을 더해야 할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 않는게 더 큰 문제이긴 하지만, 두 방법 모두 해보고, 내가 마음 편한 글쓰기를 해야겠다.

어찌되었든 생각을 글로 적는 다는 것도 복받을 일이다.

영화 이야기

어제는 영화가 보고 싶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엔, 다녀온 곳이 한국이든, 한국 바깥이든 무척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럴 때에는 영화를 봤다. 하루에 세 편 내지 네 편을 꼬박 봤다. 한달이면 당시에 개봉한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집에 앉아서 영화를 보곤 했다. 그 때 주로 보았던 영화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영화들과 태국이나 베트남의 동남아시아라고 불리우는 곳의 감독들의 영화들이었다.

"퐁네프의 연인들(레오 까락스)"을 보며 "나는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 물었고, "원스(존 카니)"를 보고 글렌 한사드의 노래 자락에 실린 슬픔 탓에 말을 잃고 지냈고, "시티즌 독(위시트 사사나티앙)"을 보고는 이 버거운 세상 즐거이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가졌다. "빨간 구두"를 보고 지독한 그 사랑에 치를 떨며 Vasco Rossi의 Un Senso를 들었다. 고다르가 생각도, 공간도, 사람도 제 멋대로 만들어 내며 찍은 영화들과 큐브릭이 언제나 까만 바탕을 깔고 만들어낸 색들이 지독하게 숨통을 막는 영화를 내 기준 잣대 위에 놓고 "지독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시클로(트란 안 홍)"에 나오는 양조위를 보며 쉬지 않고 우는 내 마음을 보고, "호텔 르완다(테리 조지)"의 돈 치들과 그의 주변 모습들을 보며 세상을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건지 분했다. 대체 맞는게 없다고 생각했다. "애프터 미드나잇(다비드 페라리오)"를 보며, 바보 같은 사람같으니라고, 나 같은 짓만 하고 있네라고 인물들을 타박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 영화에 나오는 작은 하나 하나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색감과 영화 속에서 흘러다니는 느낌들만 남아있다. 내가 좋아라 한 영화들은 대개 검붉은 색이었다. 검붉은 색, 찬란하지도, 황홀하지도, 마냥 슬프지도, 혹은 마냥 기쁘지도 않다. 무덤덤한 마음들이 흘러다니는 영화들이 많다. 증폭된 마음은 내 것이 아닌가 보다. 어려운 사람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다. 다른 이들의 고조된 마음을 갖는 대상이 조금은 다르다. 어린 아이의 놀이와 어른들의 아이 때의 흔적에 나는 고조된다. 속이고, 밀고, 당기는 어른들의 놀이에는 익숙치 않다.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에 나는 고조되고, 그 안에서 격앙된 마음을, 느낌을 갖는다. 조금 다를 뿐이지, 나도 희와 노와 애와 락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예전에 봤던 영화들이 떠올라, 다시 영화가 보고 싶어진건, 왜 일까? 예전의 여행 후와는 다른데 말이다. 그저 무료해진건가라고 생각해보지만, 그건 아니라고 또 '되돌아 보는' 내가 말 한다. 지금은 다시 여행을 떠날 때인가, 지금의 상황들이 다소 버거운가 보다. 다음의 삶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시간인데, 참을성이 아직도 부족한가보다. 그런가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2009년 12월 21일 월요일

21Dec> 넬 - Thank you





Shortly I said, 'Thank You'.
Nothing to say, however, I just have to say this one thing, "don't make me wait too long".


넬은 2008년 공연을 끝으로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그들은 2년이 되는 2010년 겨울 쯤이 되면 다시 공연을 시작할테다.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미디어 아트

미디어아트

 

미디어라는 말은 무엇이며, 아트라는 말은 무엇일까?

 

미디어라는 말을 조금 적확하게 바꾸어야 한다. 미디어는 매체라는 말로써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의미한다. 인쇄, 녹음, 출판 등의 수단으로서 매체라는 말이 쓰인다. 그리고 기술적인 차이에 의해 전자 매체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술의 수단으로써 매체, 즉 미디어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다양한 콘텐츠를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에서는 읽기, 쓰기, 보기, 듣기 등의 한 가지에만 특화된 기존의 미디어 형식을 사용하며, 또 이 형식들을 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미디어라는 말 대신 멀티미디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1]

 

사실 멀티미디어라는 용어는 모호하다.[2] 개인이 컨트롤 할 수 있고, 또한 미디어는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는 멀티미디어로 나아가며, 이 의미는 미디어들이 함께 사용되고, 한 자리에 놓이는 것으로 변해왔다.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기록들의 변화를 생각해보자. 예전에는 기술적인 한계, 즉 전송과 저장의 한계를 이유로 문자들만 기록이 가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래픽, 음성, 영상, 음성과 영상의 합, 움직이는 영상들이 사용이 가능해졌고, 이제는 각각의 다른 페이지에서만 가동되던 것이, 하나의 페이지에서 모두 사용이 가능해졌다.

 

또 예술은 무엇일까? 예술의 의미는 끊임없이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고, 바뀌어왔고, 버려지고, 되살려졌다. 예술에 대한 느슨한 의미 하나만을 생각하도록 하자. 이는 예술의 의미는 아니다. 예술의 의의, 혹은 기능 정도로 바라보자. 예술은 표현이다. 한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왜 표현할까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 혹은 그저 자신을 기록하는 정도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의의는 모두가 다를 테다. 그리고 표현하는 사람들은 표현의 방법이 모두 다르다. 그 방법을 고르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거나, 의도적으로 자신의 표현이 가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덩어리가 학자들에 의해서는 규정화된 개념문자에 의해 풀어진다면, 예술가들은 문자 혹은 문자 그 외의 방법들에 의해 풀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이 방법들이 기술의 발전을 통해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풀어지는 것이 바로 미디어 아트다.



[1]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Multimedia»에 따르면 “the seamless digital integration of text, graphics, animation, audio, still images and motion video in a way that provides individual users with high levels of control and interaction”이라 현대의 미디어를 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