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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5일 목요일

2월 25일

 

 

셀로판지를 한 장 놓고, 비스듬히 또 한 장을 올려놓고, 또 올려놓고, 그렇게 올려놓으면 겹쳐진 부분은 까맣게 보인다. 몇 장은 빼야 한다. 색이 예쁘질 않다. 이게 셀로판지인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손전등을 셀로판지 아래 놓아도, 불을 켜놓은건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도 않는다. 몇 장은 빼야한다.

 

나도 내 능력을 까맣게 만드는 몇 장의 셀로판지를 빼야겠다. 나는 _하는 사람입니다. 앞에 '무엇'이라는 말을 명확하게 만들어야겠다. "나는 _하기 위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에서 나는 "_하기 위한"의 그 무엇이 너무 많았다. 셀로판지의 합은 까만 까마귀색인 것처럼, "무엇"이 너무 많으면 "잘 모르겠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만 낳는다. 나는 "할 게 많아서" 따위의 능력을 주체 못해서라는 류의 말도 안되는 '변명'에다, "다른 거 하지, 뭐" 따위의 말로 도망갈 기회만 가질 뿐이다. 빼내야지. 쓸모있는 자존감보다, 쓸모없는 자존심이 더 커진다.

 

2009년 12월 4일 금요일

여행을 정리하는 법에 대한 사이비인문학적 글쓰기

 여행은 셋으로 나누어 바라보아야한다. 떠나기 전과 여행 중,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이다. 우리는 여행에 대한 초조함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으로 여행 출발 전까지 시달린다.
 
   이제 떠난다. 여행 중이다. 여행 중에는 순간 순간 생겨나는 위협, 그리고 환희로 가득 차 있다. 실상 그 때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아무리 기록을 남긴다 한들, 수 많은 쪽지 종이 중 한 장이다. 특히나 여러 여행을 한 이에게는 굳이 어떤 장소, 기억을 꺼내 볼 여유도 없을 수 많은 여행 중의 하나이다. 여러 가지 중의 하나라는 말은, 비단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여행은 과정이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건 어디로든 여행 중이라는 말이다. 여행은 그 자체가 내 기억으로 오롯이 남아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는, 여행을 통해 '어떤 변화를 갖게 된 나'가 중요한 것이다. 단지 과정일 뿐이다. 그 과정이 순간의 결과로서 기록으로 남아 봤자 앞 서 적은 것처럼 몇 몇 개의 경험 중 하나가 될 뿐이다.
 
   필요한 건, 여행 후의 되새김이다. 나는 여행 후 조금 시간을 갖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도 여행에 대해 글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남인도를 다녀온지도 벌써 1년 하고도 2개월이 넘었다. 이제서야 여행지의 사진을 살펴본다. 내가 언제 어디에 갔는지 명확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단지 여행의 일정이 어렴풋이 생각나고, 그 때의 삶이 파편들로 남아있을 뿐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살펴보고, 조금은 변한 나의 입장에서 저 때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 순간의 기억에 내 상상력을 더해본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 몇 시나 되었을까? 나는 무얼하고 있을까?
 
   그렇다, 타인이 보기에는 괜시리 머리 아픈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여행이란 어딘가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생물학적으로 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우리네 삶이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기리고, 기념하는 제사를 떠올리면 알 수 있다. 바로 스스로의 영향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문화적으로, 그리고 제사와 같이 타인의 기억과 기념에 의해 죽음이 기려지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단순한 이동의 시작과 끝만이 여행은 아니라는 말이다. 스스로가 그 여행으로 인한 변화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여행이 끝나는 순간인 것이다. 지금에 와서 내 여행을 더 풍부한 이야기의 여행을 만드는 방법은 바로 여행 후, 바로 정리하지 않기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여행이 던지는 감정의 풍요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때 정리를 해보는 것이다. 이야기를 떠올리고, 덧붙이고, 상상하며 말이다. 이제서야 내 여행을 온전히 정리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그 여행에 마침표를 찍는 시도이다.

2007년의 이야기

지인의 아버지가 물으셨다.
"문의 뜻이 뭐니?"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이요."
"공간과 다른 공간을 분리, 연결하는 것 아닐까, 더 정확한 의미는 드나들거나 물건을 넣었다 꺼냈다 하기 위하여 틔워 놓은 곳. 또는 그곳에 달아 놓고 여닫게 만든 시설이라는 것이지."
 
나는 글 쓰기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내가 쓰는 단어의 뜻을 명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 단지 작위적인 의미부여만 할 뿐이다. 작위적인 의미부여의 큰 예는 한자를 통한 단어 사용이다. 명확해보이는 뜻을 가지고 단지 이용한다고 착각할 뿐이다.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의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행에 관한 사이비인문학적 글 짓기

   우리는 종종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마녀도 여행을 떠나고, 새들도 제 살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고 말한다. 여행이란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단순한 공간의 이동을 여행이라 말하는걸까? 그렇다면 새들의 이동과 십자군 전쟁의 병사들은 유럽에서 서아시아로 여행을 떠났다는 말이 맞을테다. 반면에 어떤 의미, 호기심에 의한 여행, 일탈에 의한 여행 처럼 어떤 감정 혹은 지적이고, 감성적인 목적에 의한 여행이 여행인걸까? 그렇다면 전쟁과 단순한 생존을 위한 이동은 여행이 아니다. 삼장법사의 인도로의 종교적 순례 역시도 여행이며, 이 곳에서의 삶이 답답하여 떠난 나도 여행을 한 셈이 된다.
 
   탐험과 유람, 순례, 유랑, 방랑, 여행, 떠남,
 
   그 의미를 이리 상세히 보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되려 단순한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뭐 이러저러한 생각이 들긴한다. 그저 떠나는게 여행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왜냐, 모든 사람이 여행을 떠날 때 "난 이 것을 위해 가는거야!"라고 자기 세뇌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한 여행과 내가 할 여행, 혹은 여행자인 삶을 되돌이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여행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고대의 탐험가들, 혹은 현대의 여행자들을 바라보며 "왜 여행을 떠났나?"하는 질문을 통해 그 당시의 세계를 상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의 지금까지의 여행의 변화를 바라보며 다음 여행에 대해 떠올려 볼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떠날 여행에 있어 더 바람직한 경우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서 내 여행에 적절히 섞을 수도 있다.
 
   여행은 나 스스로의 축복어린 행복을 선물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세계, 다른 문화, 혹은 지금 이 곳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기 위한 일종의 공간 이동이다. 나 스스로의 만족은 여행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궁금할 때 주저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삶은 여행이 될 수 있다. 삶이 여행이 될 수 있다 믿는 자, 그 끝없는 호기심을 고이 간직하는 사람은 삶은 여행이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곳을 바라보아, 종종 다른 느낌을 갖는 사람, 그리고 그 다른 느낌을 간직하는 사람들,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러할 수 있는가도 또 하나의 질문이다.
 
   혹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이야기일 수 있다. 속세를 떠나는 행위, 지금 내가 자리잡은 세상을 떠나는 행위, 이를 통해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난다는 의미로서의 죽음을 간접 체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별 논리 없는 개똥 철학을 내어도 본다. 더 나은 세상을 발견한다면, 더 나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간직할 수도 있고, 이는 천국을 믿는 사람들도 천국의 존재를 더 깊이 알 수 있다는 어설픈 유비추리를 내어보기도 한다. (이건 물론 아닐 가능성도 높다. 알 수 없는 천국과 알고 있는 다른 문화, 세계는 그 존재부터 물론 다르기 때문이다.)



[살림지식총서 100] 여행이야기, 이진홍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2202457

2009년 12월 3일 목요일

시옷과 리을로 만든 지치는 이야기

시옷 ㅅ과 리을 ㄹ
 
 시옷과 리을이 한데 어우러져 만드는 단어들은 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람
사랑
시련
살림
소리
실례
 
 J라는 사람이 도서관에 혼자 앉아 있다. 그는 사랑을 할거라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고, 그는 시련을 겪는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사랑이 시작되지 않는건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끝없이 되물었다.
 
 크지도 않은 통통한 눈은 이제 퉁퉁 부어 올랐다. J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큰 한 숨을 쉬기 위해, 내 몸에 있는 감정들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고 싶었다. 작은 담뱃재가 눈에 들어갔다. 그 때서야 한 번 아주 적은 눈물을 흘렸다. 울지 못하는 모습이 싫었던지, 평소에는 한 두 방울 흐르던 눈물이 세 네 방울로 늘었다. 큰 한 숨은 여전히 잘 쉬어졌다. 숨을 쉬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큰 한 숨은 내가 죽어간다는 증거라는 것을 안다. 물론 당장 죽는 건 아니다.
 
 도서관에서 나와 산책을 한다. 오늘 운전을 하다 납작하게 깔려 죽은 까치 한 마리를 떠올린다. 뼈와 살은 땅에 달라 붙어버렸다. 커다란 탱크가 삼차원의 두 소녀를 깔아 이차원의 존재로 만들어버린 피비릿내나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시 담배를 한 대 문다. 통통한 내 손은 무언가로 누르면 납작해질테고, 태워버리면 작은 점이 될테다. 그러고보면 머리를 굴리며 살던 인간들은 발명가들이다. 케네스 월츠였던가 한 정치학자의 문장이 생각난다. '이론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내 삶을 발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뜩 든다. 사랑에 대한 희망은 시련으로 바뀌었지만, 이건 내게 커다란 까치 한 마리를 떠올리게 했고, 그리고 나는 처참히 깔려 죽은 나를 내가 바라보게 했고, 그 덕분에 나는 머리나 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시련은 시련만은 아니고, 사랑은 단지 사랑만은 아닌게 분명하다. 아마 희망과 절망이 그 모든 단어들 속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는 갈래에 서있다. 이건 희망을 가져야 하나, 절망을 끝내야 하는 판단에 달려 있는게니까.
 
 큰 숨을 쉬면 '히유'라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저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다. 단지 내 마음과 내 머리가 크게 울릴 정도의 소리이다. 나는 울림통이다. 커다란 울림통, 울리면 핏줄을 따라 그 울림이 전해진다. 피 처럼 내 안의 곳곳을 그 울림이 전해진다. 기억을 꺼내보면 좋을 땐 또 다른 소리를 냈었다. '하하, 호호' 슬플 땐 흐느낀다. '흑' 히읗이라는 건 소리를 글로 적을 때 참 유용하다. 히히 하하 학학 헉헉 후후 휴 호호
 
 이렇게 좋은 봄 날, 이런 글을 적는 건 큰 실례다. 하지만 나는 밥을 먹으며 실례를 한다. 죽은 시체를 빨간 불에 굽고, 펄펄 끓는 물에 데치고, 아주 날카로운 칼로 자르는 실례를 한다. 예민하다. 내가 살아야 하니 너를 죽이는 실례를 한다. 대개의 경우 죽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리고 길을 걸으면 다른 이가 걸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례를 한다.
 
 나는 실례한 사람인가. 뭐 그건 모른다. 사람이란, 아니 숨 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실례하고 있는지도. 모두여, 절망을 끝내려고나 하지 말자. 희망이나 찾자.
 
 살아야지.
 
 - 다시 나를 살림.
 

인도로의 짧은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드리는 편지글 하나



"나는 그 여행이 신비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기나 한 듯이 들뜬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내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결심했던 것이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이제껏 너는 그림자만 보고서도 만족하고 있었지? 자, 이제 내 너를 본질 앞으로 데려갈 테다."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그리스인 조르바, 영화도 있는데, 저보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이 영화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ㅋ^^;;)
 
여행이 무얼까나, 생각을 해봐요. 떠나는 것,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 쉬는 것,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 뭐 공간만 바라보잖아요, 우리는. 그리고 그 공간에서 무얼 겪을 지만 생각하잖아요. 그 곳의 문화, 사람, 생각, 수 많은 여러가지들을 겪는 것.
 
단지 바라보는 것만 말고, 그 안에 들어가면 좋겠어요. 저는 사실 인도에서도 그리 많은 곳에 가지는 않았어요. 그냥 거리에 앉아 있거나,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거나 하고 말이에요. 참 낯선 것들 투성이었어요. 낯선 공간 안에서 낯선 곳, 낯선 사람, 낯선 문화를 바라보잖아요. 이왕이면 여행 중에 그 낯선 것들을 잔뜩 누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여행자들을 만나고, "문화 유적"이라 이름붙여진 곳보다 "사람들 사는 곳"에 박혀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앞에 적은 구문을 읽다보면 참 재미있어요.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림자만 바라보지 않으면 좋겠어요. 모든 여행이 좋은 '상품권'은 아닌 것 같아요. 여행을 다녀온다 해서 삶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뭐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새로운 '기억'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건 제 여행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럴 수도 있어요. (법사님이 이런 말씀은 절대 안하시겠지만) '이 녀석이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여행 어떻게 하시라!'고 말할 자격은 있는거니 라고 물으시면 쉽게 '네'라고 답은 못할테에요.]
 
새로운 기억보다는 사람살이에 힘되는 여행하시면 좋겠어요. 사진찍으며 기억 채우는 여행보다는, 기록은 덜 하더라도 여러 이야기 나누고, 두려움을 더는 여행하면 좋겠어요. 또 그 자리에서 바로 판단하지 않는 그런 여행이면 좋겠어요.
 
 저 문장에 적힌 '본질'이라는 녀석은 여행하며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녀석이 아닌 것 같아요. 여행이 끝난 후, 낯선 공간과 낯선 문화들, 낯선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돌아와, 내게 익숙한 곳으로 왔을 때, 그 때에서야 조금은 내가 보이지 않나 싶어요. 그 낯선 것들을 떠올리며 익숙한 나, 내 삶, 공간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때나 그 찾으려는 게 무엇이었나가 보이는 것 같아요. 큰 기대보다, 소소한 것들이 더 잘 보이기도 하고요. 문화적인 차이들, 공간의 차이들, 이런 것들은 너무 큰 기대가 아니었나 싶고요. 되려 '나는 이런 여행했던 사람이구나',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하는 것들 처럼 평소에도 고민하는 그런 소소한 것들이요. (이게 소소한게 아니려나요...^^;;)
 
낯설게 본다는 건 '이건 아냐!'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낯선 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가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이건 낯설어, 힘들어!"가 아니라요.)
 
여하튼 낯선 이들의 삶 속에 풍덩 들어가는 여행 하시기를 바래요.
 
다른 문화의 여행자들 많이 만나시기를 바라고요. ^ ^ (이 참에 외국어 말하기 연습도! 작은 옥편 하나 들고가면, 일본, 중국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기에 괜찮은 듯 해요-ㅋ)
 
그럼 모두에게 즐거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즐거움 가득찬 여행 준비하시기를, 좋은 여행되길 바랍니다.
Bon journey!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여행> 2007년 1월의 인도를 되돌이켜.



<사진을 찍은 곳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인도의 Kerala, 께랄라주는 인도의 동남(South-Eastern Part of India)쪽에 있다. 1498년 Vasco Da Gama의 상륙, 그리고 이어지는 Portugal, France, Holland 등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며,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진 가운데  최초로 선거를 통한 공산 정권이 들어선 곳이다. (인도는 지방자치제를 택하기에, 각 지역에 따라 정당, 혹은 정치 체제가 다르다.) 21세기에 들어, Tsunami로 인해 해안 혹은 강 주변의 작은 마을이 파괴되었고, 지금은 다시 삶의 터전을 만들고 있는 곳이다.



<배타고 수로 여행>

   Kerala에서 벗어나 Fort Kochi(http://www.google.com/search?hl=en&q=fort+kochi)로 향하는 뱃길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 때 만난 영국인과 신나게 Brit. Rock 이야기를 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 친구와 함께 Snowpatrol의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나는 배 갑판 위의 의자에 앉았다. 어떤 풍덩 소리가 났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빈 배가 보였다. 그리고 얕은 물거품이 일어난 걸 알게 되었다.

    저 배, 분명 누군가가 강 한가운데로 저어 왔다. 그저 나무기둥을 묶어 만든 작은 포구에 메어놓았던 줄이 풀려 저기까지 물길에 밀려 온 것이 아니다. 얕은 물거품이 일어난 걸 보니, 누군가 배를 저어 저 곳까지 왔고, 그 혹은 그녀는 강 안으로 뛰어들었나보다.  


 

<이미지에 대해 상상하는 건 피해야겠다.>

   살기 위한 곳이다. 삶을 위한 곳이다. 평화로워 보인다, 어떤 운치가  존재한다와 같은 말은 그저 듣기 좋은 스스로만을 위하는 소리이다.


 

< 일종의 분석, 도시 사람 되돌아보기>

   왜 뛰어든 것일까? 저 날은 무척 더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배를 저어 온 사람은 더위를 못 이겨 강물 안으로 들어간걸까? 혹은 삶이 버거워 수영을 하기 위한 것일까?

    아마도,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을테다. 나와 같이 여행자들은 스스로의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굳이 강물로 뛰어들지 않는다. 강물 잠수는 유희 거리치고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커다란 Beach에서 피부 태우기나 할 뿐이다.

   뱃사람에게 강물로의 잠수는 그에게 노동이다. 마치 같은 시간, 지구 어딘가에서 커다란 건물 안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나, 거드름을 피우며 크고 푹신 푹신한 팔걸이 의자에 앉아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겠다는 대통령이나, 작고 어두운 반지하 방에서 곰 인형 모양의 천쪼가리를 꿰메는 사람이나, 여하튼간에 누구나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다. 그들의 노동 방식이다.

    강에서의 물고기 잡이는 여행하는 도시인에게는 새로움을 줄테다. 특히 나와 같이 한강을 끼고 사는 사람에게, 강은 단지 물 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관광삼아 유람선을 타고, 수상택시를 잡아 타는 곳이니 말이다. 생존의 터전은 아니다. 또 가끔은 쉰다는 명목 하에 찾아가는 곳이지, 삶의 터전이 아니다. 내가 가는 학교와 가야 할 사무실과 같은 공간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저 곳은 쓰나미(Tsunami)가 몰아쳤을 때, 대부분의 주민이 죽었고, 커다란 나무 외에 대부분의 생명이 그 삶을 끝낸 곳이다. 이런 곳에서도 누군가는 살기 위해 다시 노동을 한다. 살기 위한 당연한 노동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노동에 대해 우리는 걱정하고 또 안타까워한다. 우리의 겉 보기 좋은 이기적인 삶을 되새겨보지는 않고 말이다. 대개의 자연을 즐길 것으로만 바라본다. 이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는 요지다. 자연은 옛날의 사람들이 살던 곳이고, 생활하던 곳이다. 하물며 지금도 자연을 터전으로 가진 사람은 존재한다. 도시에서만 살아 온 나와 다른 공간에 있기에 만날 일이 없었고, 만난 일이 없으니 그런 이는 없다고 여기고 사는 일이 생겨났을 뿐이다.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자연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편리한 공간으로, 인간에게 최적화된 공간으로 만드는 시도는 슬픈 결과를 낳는다. 우리의 편리가, 저들과 같이 자연을 터전으로 삼는 이들에게 재앙이 된다. Tsunami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수 많은 '세계인'들의 도시화와 자연의 파괴가 Tsunami를 불러일으켰다. 루머이긴 하지만, 미국의 환경무기 실험이 탓이라는 이유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관광지가 되어버린 해안가의 탓이 있다는 사실도 새겨봐야 한다. 편리를 위해 지형을 바꾸고, 땅을 메꾸고, 잘라내는 우리의 어리석은 짓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연은 대상이 아니다. 무언가 손을 써야 하고, 또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엄연히 우리의 터전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몇몇 사람들의 이기심 어린 자연에 대한 정복 혹은 인위적 변화는 우리보다 더 자연에 두려워하며, 친하게 지내는 이들에게 아픈 자연의 복수를 전가할 높은 가능성이 생겨난다. 자연을 위해서나, 그의 복수 대상이 되버리는 약한 사람을 위해서나, 혹은 결국 마지막 복수의 대상이 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자연을 어떤 대상으로 바라보는 짓을 그만둬야 한다.


 

<단순한 묘사>

   강이 있다. 그 강을 지나는 나는 빈 배 한 척을 발견했다. 물거품이 배 주변에 그리 크지않게 생겨난 걸 보니 배의 주인은 내다 팔 물고기를 잡으로 바다에 뛰어든 모양이다.

 

 

<반성>

   인도가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에다  '자연'과 삶의 '문화'를 잘 합치시켜 나가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과 요가, 환상의 나라라는 말 장난에 매혹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영국인들이 유사한 식민지배를 위해 인류 최초로 시도한 '인도학'이라는 일종의 문화학을 만들어 낸 시도와 비슷할 뿐이다. 합치라는 말은 사실 웃기다. 그 자연과 문화가 동떨어진 것이 아닌데 말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자연을 두려워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욕심이 덜한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 내가 그 나라를 이렇게 정리를 하는 시도 역시도 류시화 시인이 만든 인도에 대한 환상과 같은 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러 기술의 발전 단계, 먹을거리와 종교, 깨침을 위한 여러 습관과 학문이 존재하는 문화의 다양함, 이러한 '인간의 노력'과 '자연'이 어우러지게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이 인도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흠, 허나 인도 안에서 마구 커지는 자본주의의 힘 탓에, '도시가 자연보다 나음', 혹은 '사람으로서의 성장'이 아닌 '편리의 개발'이 먼저가 되어가는 모습으로의 변화가 인도를, 인도로의 여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차근 차근이 필요하고, 더불어가 필요한 지금이다.